[조경칼럼] 잘 짜여진 각본, 선형공원
[조경칼럼] 잘 짜여진 각본, 선형공원
  • 변재상 신구대 교수
  • 승인 2024.03.11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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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진 길 따라 걸으며 보행자들의 방향과 속도 제어
걷고 싶고, 보고 싶은 도시 경관 이끄는 '촉매' 역할 기대
변재상 신구대 교수.
변재상 신구대 교수.

한국계 미국 배우 스티븐 연이 주연을 맡아, 미국 에미상(Emmy Awards)에서 작품상과 남녀 주연상을 포함해 무려 8관왕을 차지한 ‘성난 사람들(원제 BEEF)’이란 드라마가 있다. 매 순간 잘못된 선택으로 점철된 인생 속에서 많은 스트레스를 받는 현대인의 모습을 블랙 코미디로 실감 나게 그려낸 작품이다.
현대인들은 무의식적으로 매 순간 선택을 강요받고 머리가 복잡해진다. 스트레스로 좀 쉬고 싶고, 아무 생각 없이 멍하게 걷고 싶은 마음이 들 수밖에 없다. 이런 순간이 찾아온다면 가까운 주변의 선형공원을 찾아서 걸어보라고 귀띔해 주고 싶다. 
코로나19를 계기로 일방향의 선형공원은 중요한 공원의 형태로 등장했다. 강요된 선택 없이, 머리를 비운 채, 아무런 간섭 없이, 짜여진 각본대로 방향과 속도를 제어해 주는 곳이 선형공원이다. 
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공원에 대한 매뉴얼은 단순하다. 정해진 길을 따라 걷기만 하면 된다. 잘 만들어진 영화를 보면서 머리를 비우고 심신을 단순하게 정화하는 순간이다. 다른 점은 앉는 게 아니라 걷는다는 것이다.

뉴욕의 하이라인은 베슬에서부터 리틀아일랜드까지 이어지는 선상을 연결하는 동시에, 선상의 시야를 닫아줌으로써, 궁금하고 호기심이 생기는 선형공원의 경관을 연출했다. 사진=변재상
뉴욕의 하이라인은 베슬에서부터 리틀아일랜드까지 이어지는 선상을 연결하는 동시에, 선상의 시야를 닫아줌으로써, 궁금하고 호기심이 생기는 선형공원의 경관을 연출했다. 사진=변재상

뉴욕의 하이라인은 뉴요커들뿐만 아니라 전 세계인이 사랑하는 전형적인 선형공원이다. 같은 선상을 왕복해야만 하는 선형공원은 지루해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선형 상의 진행방향과 역방향 보행시 보이는 경관에 변화를 줘야 하는데 이를 잘 해결한 선형공원이 하이라인이다. 
풍성한 나무와 초화들을 의도적으로 활용해 시야를 적절히 닫아주면서, 선형을 되돌아올 때는 새로운 경관이 전개되도록 조성했다. 만약 개방감을 위해 시야를 열어주었다면, 오히려 지겹고 단조로운 공원이 되었을 것이다. 
더불어 토머스 헤더윅의 '베슬'이라는 명확한 시점(혹은 종점)과 '리틀아일랜드'라는 명확한 종점(혹은 시점)이 있어 더욱 걷고 싶은 장소가 되었다. 센트럴파크가 보고 싶은 공원이라면 하이라인이 걷고 싶은 공원인 이유이다. 

애틀랜타의 벨트라인은 도시 재생의 목적으로, 방문객의 관람보다는 지역 주민의 이용에 비중을 둔 열린 선형공원으로 조성됐다. 사진=변재상
애틀랜타의 벨트라인은 도시 재생의 목적으로, 방문객의 관람보다는 지역 주민의 이용에 비중을 둔 열린 선형공원으로 조성됐다. 사진=변재상

비슷하지만 다른 사례로 애틀랜타의 벨트라인이 있다. 둘을 비교해 보면 확실히 이용객의 차이가 있다. 하이라인은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공원인 데 반해, 벨트라인은 관광객보다는 지역주민들의 이용 빈도가 높다. 
조성 당시부터 바이커들을 고려해 개방감 있게 공간을 조성했으며, 산책보다는 이동 통로의 역할에 좀 더 주안점을 두고, 바닥 포장재 역시 목재나 블록보다는 콘크리트나 아스팔트와 같은 재료를 주로 사용했다.

다소 극명하게 대비되는 두 공원의 목적에서 선형공원의 형태를 그려보고 결과를 가늠해 볼 수 있다. 
복잡한 도심에서 면적 공원도 중요하지만, 잘 짜여진 각본처럼 의도된 선형공원을 목적에 맞게 잘 살릴 수 있다면, 걷고 싶고 보고 싶은 도시를 만들기 위한 촉매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관광객 유치에도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선형공원이 더 이상 조연이 아닌 당당한 주인공으로 등장할 때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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