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칼럼] 풀과 나무와 친해지는 법
[조경칼럼] 풀과 나무와 친해지는 법
  • 박승진 디자인스튜디오 loci 대표
  • 승인 2023.06.13 15: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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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풀과 나무에게는 저마다의 '이름'이 있다
박승진 디자인스튜디오 loci 대표.
박승진 디자인스튜디오 loci 대표.

봄은 늘 아주 작은 녹색의 잎에서부터 시작됐다. 마당 한구석, 커다란 단풍나무 아래에 언제나처럼 손톱만 한 이파리들이 올라올 때면, 나는 새 학기 교과서를 받아 들고는 달력 종이를 잘라 책 표지를 싸고 있었다. 
내 유년의 기억은 우리 집 마당에 집중돼 있다. 작은 도시락 가방에 서울우유 한 병과, 삼립빵 한 개를 넣고는 마당의 이 나무 저 나무를 옮겨 다니면서 즐겼던 어떤 꼬마의 피크닉. 오동나무, 은행나무, 향나무, 단풍나무, 앵두나무, 목련에서 사루비아, 칸나, 분꽃, 다알리아, 채송화까지 내가 기억하는 식물의 이름들은 가물가물하지만, 그것들이 만들어 냈던 시절의 풍성함은 아직도 눈앞에 생생하다. 

몇 해 전쯤 우연히 ‘잡초’를 주제로 한 개인 게릴라 프로젝트를 진행한 적이 있다. 
집에서 가까운 노들섬 공사 현장이었는데, 어느 날 운전을 하고 다리를 건너던 중 정체가 심해 차가 거의 멈춰 선 지점에서, 공사 가림막 아래 줄지어 자라난 ‘잡초’들을 발견했다. 마치 갤러리의 한쪽 벽면을 차지하고 있는 전시를 보는듯한 착각이 들었다. 
아름다웠다. 어디서 왔는지, 누가 일부러 씨를 뿌려 놓은 것은 아닌 게 분명했고, 우리가 흔히 ‘잡초’라고 뭉뚱그려 부르기는 해도 이 녀석들도 나름 귀한 이름이 있을 텐데, 아무튼 이름을 찾아냈고 이름표를 붙여주기로 했다. 
망초, 좀명아주, 강아지풀, 노랑선씀바귀, 마디풀, 개똥쑥, 참새귀리, 큰방가지똥, 까마중, 닭의장풀. 참 정겹고 소박한 이름들이다. 

얼마 동안이나 이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을지 알 수 없었지만 지나는 사람들이 한 번이라도 더 쳐다봐 주고 이름을 불러주기를, 그래서 누군가의 관심을 받게 되고, 더불어 삭막한 도시에서 나름 빛나는 귀한 존재로 여겨지기를 바랐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구분하기 힘들고, 알 수 없으면 마음이 가지 않는 법이다. 
풀과 나무들은 그 존재만으로도 우리의 삶터를 더 아름답고 건강하게 만들어준다. 풀과 나무에 진심으로 애정을 갖는 일은 그 이름을 불러주는 것에서 시작한다. 값비싼 표찰이 아니라도 좋다. 그저 우리 이름 한 줄만 들어간 소박한 작은 이름표라도 좋을 것이다. 
동네 골목골목마다, 공원 구석구석에 좀 더 많은 이름표를 발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무에, 풀에 작은 관심이 있다면 기꺼이 이름표를 길잡이 삼아 식물을 검색해보고, 또 알아가면서 경이로운 세계에 감탄하기를 기대해 본다. 풀과 나무와 친해지는 법은 의외로 쉽고 간단하다. 

 

정리=한국건설신문 황순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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