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경쟁력 제고, 고비용 구조의 타파에서
국제경쟁력 제고, 고비용 구조의 타파에서
  • 이상호 한국건설산업연구원 연구위원
  • 승인 2003.10.06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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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호 연구위원 (한국건설산업연구원)


멕시코 칸쿤에서 열린 WTO 제5차 각료회의가 결렬되었다. 그 이유는 ‘싱가포르 이슈' 에 대한 개도국과 선진국의 입장 차이 때문이라고 한다. ‘싱가포르 이슈’란 제1차 WTO 각료회의(1996년)때 무역과의 관계에 대한 분석 작업이 진행되었던 투자, 정부조달 투명성, 무역 원활화, 경쟁정책 등 4가지 분야를 말한다. 선진국들은 ‘싱가포르 이슈'에 대한 규범을 수립하기 위해 하루빨리 다자간 협상을 시작하자고 주장한다.

반면에 개도국들은 투자나 정부조달 등 모든 분야에서 경쟁력이 떨어지는 만큼 아직 일괄적인 규범을 수립하기에는 여건이 성숙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싱가포르 이슈' 그 자체에 대해서 반대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한국 건설산업의 입장에서도 정부조달 투명성이나 경쟁정책과 같은 ‘싱가포르 이슈'는 대단히 중요하다.

한국의 건설업체가 해외건설시장에 진출하기 위해서나, 외국 건설업체가 한국 건설시장에 진출하기 위해서나 정부조달의 투명성이 제고되어야 하고, 국내외 업체간의 경쟁을 제약해서는 안된다는 규범이 확립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알려진대로 멕시코 칸쿤회의에서 한국은 농업분야에서 개도국 지위를 인정받고자 했다. 그런데 ‘싱가포르 이슈'에 대해서는 선진국 입장에 동조했던 것 같다. 특히 건설산업의 경우는 시장개방 폭이 확대될수록 더 유리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한국의 건설업체들이 “양질의 저임금 노동력"에 기초하여 국제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었던 1970년대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건설시장 개방 폭이 커진다고 해서 한국의 해외건설산업이 활성화되리라는 막연한 기대감을 가져서는 곤란하다. 거꾸로 국내 건설시장에 외국 건설업체들의 진출이 활성화될 가능성은 높다. 그 이유는 한국 건설산업의 국제경쟁력이 크게 저하되어 있기 때문이다. 토목이나 건축공사에서의 국제경쟁력은 말할 것도 없고, 플랜트공사중에서도 일부 공종만 간신히 비교우위를 유지하고 있는 것 같다.

건설산업에서 국제경쟁력의 실체는 경제성, 혹은 효율성이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 있다. 경제성이나 효율성은 한마디로 ‘저비용 고품질'을 뜻한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1980년대부터 “부실공사 방지"라는 명분을 방패막이로 삼아 ‘고비용(을 지불하더라도) 고품질'을 지향해 왔다. “싼게 비지떡"이기 때문에 제값을 주어야 제대로 공사를 할 수 있다는 논리가 지배했다. 부실공사로 인한 대형참사를 자주 겪다보니 국민적 정서도 ‘고비용 고품질'을 지향하게 된 것은 이해할 만 하다. 하지만 고비용을 지불했는데도 고품질을 가져 왔는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모르는 것 같다. 뿐만 아니라 시간이 흐를수록 고비용 구조는 더 단단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 면허제도와 입찰제도를 비롯한 각종 건설제도, 기업의 이윤추구 동기나 건설인들의 의식구조·문화 등도 고비용 구조의 정착에 한 몫하고 있다.

잠깐 눈을 돌려 100년 전의 미국 자동차 산업과 오늘날의 정보통신(IT) 산업을 보자. 1910년대 초반에 미국의 자동차 업체 수는 약 300개였다. 그런데 1914년에 포드사에서는 1만 3천명의 직원으로 약 27만대의 자동차를 생산한 반면, 나머지 299개의 미국 자동차 업체들은 6만 6천명의 직원으로 겨우 28만 7천대밖에 생산하지 못했다. 이렇게 된 데에는 포드사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비용우위 효과를 지녔기 때문이다. 예컨대, 1908년에 850달러에 판매되었던 포드사의 ‘모델 T’는 1916년에 8년전과 비교해 볼 때 반값도 안되는 360달러에 판매되었다.

오늘날의 IT산업에는 ‘무어의 법칙(Moore's Law)'이란게 있다. 인텔사의 공동 창립자인 고든 무어가 여러 해 동안 관찰하여 얻어진 실험적인 법칙인데, “가격을 고정시켰을 때, 마이크로칩의 복잡성(칩에 놓여지는 회로의 개수)이 약 18개월마다 두배로 증대된다"는 법칙이다. 이같은 무어의 법칙은 디지털 경제, 신경제 혁명을 설명하는 중요한 열쇠로 평가된다. 20세기 후반부터 경제 인프라가 급속하게 디지털화되어 왔는데, 그 비용이 1년 반만에 50%씩 줄어왔기 때문에 인플레이션을 낮추는 효과를 가져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급성장했던 기업이나 산업은 이같은 원가 혁명, 생산성 혁명을 거쳤다. 그런데 한국의 건설산업에서는 과연 동일한 품질의 시설물을 건설하는데 1년반 전과 비교해서, 10년 전과 비교해서, 혹은 50년이나 100년 전과 비교해서 얼마나 공기가 단축되었고, 공사비가 절감되었을까? 그 반대로 공기나 공사비는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지 않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비용 구조를 고착화시키는 정책이나 제도는 계속 번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고비용 구조를 심화시키는 정책이나 제도는 대개 이익집단의 기득권을 침해하지 않으면서 발주자나 건설업체 모두에게 “누이좋고 매부좋은" 것으로 인식되기 때문일 것이다.

미국의 국가건설산업(National Construction Goal: NCG)이건 영국의 건설산업 혁신운동이건 간에 국가적인 혁신 전략의 핵심은 생산성(productivity)과 효율성(efficiciency)의 향상에 있었다. 그 내용은 공사비 절감 30%, 공기 단축 50%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본도 공사비 10%절감을 위한 운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왔다. 한국은 미국·영국·일본보다 더 고비용 구조의 건설산업을 갖고 있으면서도 정작 고비용 구조의 타파를 위해 국가적인 노력을 기울인 적이 별로 없었다.

한국에는 공사비 20%절감을 목표로 한 ‘공공건설사업 효율화 종합대책(1999.4)'이 있지 않았느냐고 반문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공공건설사업 효율화 종합대책'에서 말하는 공사비는 애매모호한 생애주기비용(Life Cycle Costs)을 의미하는 것이었지, 직접적인 공사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고비용 구조를 심화시키는 듯한 방안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한국 건설산업의 국제경쟁력 상실에 대한 문제 제기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국제경쟁력 상실의 근본원인은 지난 20년간에 걸쳐 국내 건설산업에 고비용 구조가 정착되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한국 건설산업의 국제경쟁력을 제고하고자 한다면, 무엇보다 먼저 고비용 구조의 타파부터 추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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