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인이 그리는 미래> 포스트시대, 잠재된 욕망에 조경의 미래가
<조경인이 그리는 미래> 포스트시대, 잠재된 욕망에 조경의 미래가
  • 김용규 (주)일송환경복원 대표
  • 승인 2015.08.24 11:4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욕망을 자극하는 ‘공간’…
‘나음’ 아닌 ‘다름’의 공간


▲ (주)일송환경복원 대표
(재)환경조경나눔연구원 미래포럼 기획위원
모두들 조경의 위기를 논한다. 위기감은 설계건 공사건 먹고 살기가 예전 같지 않음에서 온다. 물론 이는 조경만의 문제는 아니다. 국가 전체가 이제 ‘성장시대’를 마감하는 단계에 이르렀음에서 온 것이다.
기실 유난히도 지금을 ‘역사시대의 종언’이니 ‘문자시대의 종언’, ‘이데올로기의 죽음’, ‘주체의 죽음’ 등 한 시대를 풍미하던 주류가 마감하고 있는 시기로 지칭한다. 바야흐로 ‘포스트(post) 시대’다.
성장시대는 산업화(industrialization)로 비롯됐다. 산업시대란 ‘효율성이 강제되던 시기’다. ‘빨리, 많이’를 모토로 프로토타입(prototype)을 만들고 이를 무한 복제한 상품을 시장에 내놓으면 부를 축적한 대중들이 소비했다. ‘만들면 팔리는 시대’이다. 과학이 이룩한 성과는 기술로 전환돼 눈부신 발전을 이루어 왔고, 밝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고 믿었다. 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지는 역사는 끊임없이 앞으로만 나아갈 것으로 여겨졌다. 이런 시대가 끝나가고 있다고 한다. 그럼 앞으로 어떤 시대가 올 것인가?
그렇다. 미래는 이미 현재 속에 있을지 모른다. 산업화가 진행되던 19세기 후반 등장한 모네(Claude Monet)의 루앙성당 연작 시리즈는 사물의 ‘진짜’가 무엇인지 의문을 갖게 한다. 어렸을 때 못 박히게 들었던 ‘책속에 진리가 있다’는 말은 어느새 진부해졌다. 더 이상 진리를 얻고자 책을 읽지 않는다. 사진을 통해 미리 본 관광지는 현지에서 결코 체험할 수 없다. 진짜 앞에서 시시함에 실망한다. 텔레비전 노래 경연 프로그램에선 원곡보다 편곡된 곡이 더 깊은 감동을 준다. 가면 벗은 가수에서 드러나는 건 동일성에 대한 편견이다. 원본이 지닌 아우라가 사라졌음은 물론이고 ‘원본보다 나은 복제’, ‘원본 없는 복제’도 등장한지 오래다. 80년대를 휩쓸던 이데올로기의 광풍도, 경외와 두려움의 영원한 ‘객체’인 자연도 그 위상을 내려놓았다. 아마존 밀림에도 지번(地番)이 부여된 마당에 과거의 그 자연이 아니다. 객체가 흔들리니 ‘주체’인 인간도 흔들린다. 입는 옷, 사용하는 도구, 일상을 구성하는 모든 것이 복제품이다. 복제품속에서 사는데 무엇이 두렵겠는가?
조경도 산업화의 ‘강제된 효율성’하에 시장규모와 설계, 시공 기술 등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성장시대의 사물은 미적으로 끊임없이 세련되어 왔지만 복제품들이고, 공간에는 효율과 기능, 당위와 동일성이 강제됐다. 복제품 홍수 속에서 ‘다름(different)’보다는 ‘나음(better)’, ‘개인’보다는 ‘공동체’가 추구됨은 당연지사이다. 성장시대에는 데이터로 가까운 미래를 예측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금과옥조로 여겨지던 가치와 상식, 통념들이 무너져 내리는 포스트시대에 미래는 과거의 데이터로 얻어지지 않는다. 아무리 많은 데이터를 모아 투사해봐야 보이는 건 과거밖에 없다. 두려움은 앞에 놓인 것이 ‘아무것도 없음’에서 오는지 모른다. 이제 무엇에 기대어 앞으로 나아갈 것인가?
노자철학에서 무(無)는 ‘아무것도 없음’이 아니다. 무는 무한(無限)해 그 끝을 헤아릴 수 없음이다. 그러니 무가 유(有)보다 더 근본이다. 현대 서양철학도 비슷한 생각을 한다. 잠재성과 현재성의 구별이 그것이다. 유와 현재성은 현실로 드러난 것이다. 이 드러남은 통념, 상식, 관행 등의 그물코에 걸러진 것들이다. 이들 사이를 빠져나간 것들이 더 많다는 것이 요즘의 사유방식이다. 그물코에 걸러지지 않은 것, 있지만 드러나지 않은 것, 그 것을 다시 꺼내야 새로운 미래가 그려진다.
잠재된 것은 산업시대의 표준화, 규율화, 동일성 등의 횡포에 억눌린 욕망이다. 끊임없이 차이를 생성하고, 차이를 무한히 반복하는 욕망. 조경에 드리워진 ‘기능’과 ‘아름다움’의 그물코를 벗겨 보자. 멋진 수형의 소나무 군식, 예쁜 자생화 화단, 넓은 잔디밭, 미끈한 곡선의 보행로를 가진 공원. 이것보다 더 예쁘고, 더 멋있는 공원이 미래에도 그려야 하는 공원일까?
폭염에 지치는 요즘, 고수부지 기우는 저녁 햇살속에 샤워하고 싶지 않으신가? 비 오는 토요일 오후, 어슬렁어슬렁 슬리퍼 끌고 주변 공원으로 가 빗소리 배경삼아 소설 한권 읽고 싶지 않으신가? 정원 가꾸기를 원하는 주민들이 산책로 안쪽에 가꾼 작은 정원들이 줄 지워진 회양목 보다 더 자극적이지 않은가? 억눌려 온 욕망을 자극하는 공간은 ‘나음’이 아닌 ‘다름’의 공간이다. 조경에 닥친 위기를 극복하는 키워드로 욕망, 어떤가?

 

한국건설신문 주선영 기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