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크리트산업계 ‘큰별 지다’
콘크리트산업계 ‘큰별 지다’
  • 김덕수 기자
  • 승인 2014.12.29 09: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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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청남 아주그룹 문태식 명예회장

한국건설신문 김덕수 기자 =   아주그룹 창업주이신 문태식 명예회장님께서 2014년 12월 26일(금) 오후 9시 24분 노환으로 별세하였다.

■ 장례 일정
    - 장례식장 :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30호 (02-3010-2230, 2356)
    - 영결식 일시 : 2014년 12월 30일(화) 오전 6시 (발인 오전 7시)
    - 영결식 장소 : 서울시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 장지 :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진관로 선영
    - 관련회사 : 아주그룹(아주산업,아주캐피탈,아주IB투자,아주모터스,아주저축은행 외) / 신아주(상봉터미널,아우토플라츠 외) / AJ가족(AJ렌터카,아주렌탈,아주코퍼레이션 외)
    - 자녀 : 장남(문규영 아주그룹 회장), 2남(문재영 신아주 회장), 3남(문덕영 AJ네트웍스지주부문 사장) 외 2녀


“국가와 사회에 어떻게 기여할 것인가를 고민하여 창업하였고, 그러한 국가관을 가지고 사업을 하다보니, 그 동안의 사업은 조금도 비뚤어지지 않고 오늘날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04.12월 아주산업 오산공장 이전식 축사 中)

[출생, 학업 및 성장과정]
문태식 명예회장은 1928년 일제 강점기의 암울한 시대에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평범하지만 집념이 강하고 호기심이 많은 소년으로 자라났다.
남다른 학구열로 어려운 살림에도 1941년 서울 대창학원과 1943년 대신상업전수학교를 졸업했다.
이처럼 문태식 명예회장이 학업에 대한 열의를 불태웠던 것은 이렇다 할 사업적 기반이 없었던 식민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배우는 길’ 밖에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문태식 명예회장은 1944년 방적공장에 취직하며, 사회에 첫 발을 내딛었다. 하지만 민족적 자긍심과 청년 기업가로서의 기질이 싹텄던 문태식 명예회장은 당시 모두가 부러워하던 직장을 하루아침에 그만두고, 새로운 도전을 선택하며, 목재 관련사업에 뛰어들었다.
당시 문태식 명예회장은 부강한 나를 만들기 위해서는 나라의 근본인 농업이 지탱돼야 하고, 근대사회로의 전환을 위해서는 건설산업이 부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또 못다한 공부에 대한 열망으로 1946년 혜화전문(현 동국대학교) 사학과에 입학했다. 그는 이곳에서 역사를 공부하며 국가 보은에 대한 사명감과 국력의 중요성을 다시한번 되새기며 경제부국의 꿈을 갖게 됐다.

[창립 배경 및 철학]
문태식 명예회장은 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기업인이었으며, 항상 미래지향적인 사고로 새로운 분야를 앞서 개척한 경영자였다. 그는 청년기에 이미 농기구 자루 사업으로 사업가적 자질을 키웠다.
이런 그의 사업가적 안목은 1950년대 시멘트 무역업으로 이어졌고, 1960년대 정부의 농어촌 전기보급 사업과 맞물려 나무 전주를 콘크리트 전신주로 대체하는 사업을 통해, 현재 아주그룹의 모태가 되는 ‘아주산업’의 초석을 다졌다.
서울 망우리에 6만 6116㎡ 부지의 콘크리트 전주 공장을 설립한 것이 지금의 아주그룹을 있게 한 근원지이라 할 수 있다.
이후, 1970년대에는 건설용 고강도 흄파이프(Humepipe)를 공급해 국내 굴지의 건자재 기업으로 자리매김 하고, 1980년 망우동에 레미콘 공장을 지어 레미콘 사업진출을 본격화했다.
아주그룹의 모기업인 아주산업이 탄생할 수 있었던 요인을 꼽는다면, 오로지 문태식 명예회장의 투철한 기업가정신과 국가관에서 비롯됐다.
실례로, 사회 기반 인프라가 부족했던 1950년대 말에는 전기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전깃줄을 맬 수 있는 50년 이상 키운 10m 길이의 전주가 필요했다.

 그러나 온 산야가 벌거숭이였던 당시 그런 큰 나무를 구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고, 결국 일본이나 캐나다에서 비싼 돈을 주고 수입해 사용해야만 했었다.
이런 상황에서 문태식 명예회장은 ‘전신주를 콘크리트로 만들면 5분이면 가능한 일인데, 왜 비싼 외화를 주고 몇 달 몇 년씩 걸려 굳이 나무 전주를 수입해 사용할 필요가 있을까?”라는 발상의 전환을 통해 새로운 사업에 도전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
이러한 결심을 가능하게 했던 원동력이 있다면, ‘무엇이든지 국가와 사회의 발전에 이바지해야겠다’는 문태식 명예회장의 강한 시대정신이다.
이러한 문태식 명예회장의 시대정신은 현재 아주그룹의 창업이념인 ‘개척자정신’ (開拓者精神)에 면면히 살아 숨쉬고 있으며, 나아가 이를 바탕으로 지난 50여년간 지속적인 성장을 이룩하고, 국가발전에 기여하며 지역사회와 공존하는 시민기업으로 나아가고 있다.
아주그룹 관계자는 “위기를 기회로,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 도전해왔던 문태식 명예회장의 리더십은 바로 아주그룹의 근간이 되는 ‘개척자정신’의 또 다른 이름이다”고 설명했다.
 
[인증 및 상훈, 주요 대외활동]
문태식 명예회장은 1965년 새로운 사업 구상 차, 기업인 1세대로 평가 받는 유수 기업의 경영자들과 함께 유럽산업을 시찰하는 산업연수단원으로 활약, 해외 콘크리트 제조기술을 국내에 알리며 결실을 맺기도 했다.
1965년 국내에서는 최초로 콘크리트 전주, 파일, 흄관 부문에서 품질인증마크를 취득했으며, 1974년에는 콘크리트 전주와 콘크리트 파일의 KS인증마크 허가를 취득했다.
또 이러한 각종 신제품과 신기술 개발뿐만 아니라, 1961년 아주산업 최초의 전주 공장인 망우공장, 1964년 흄관공장에 이은, 1975년 오산공장 준공을 신호탄으로 신규사업 확장에 성공하며 문태식 명예회장의 리더십은 더욱 빛을 발하게 됐다.
1972년 연세대 경영대학원(경영연구회 14기) 수료, 1981년 한국원심력공업협동조합 이사장, 1983년에는 동국대학교 동창회 부회장을 역임했다.
특히, 아주그룹 사업의 첫 발원지인 중랑구에 토지 26만3799㎡, 시가 400억 상당의 사재를 기부, 평소 ‘국가와 사회를 위해 이바지하겠다’는 경영자로서의 신념을 몸소 실천하며, 주변의 귀감이 됐다.
문태식 명예회장은 이러한 노블리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정신을 확산시킨 공로를 두루 인정받아 미국 경제전문지 Forbes가 선정한 2013년 “48 Heroes Of Philanthropy”에 뽑히는 영예를 안았다.
또 지역사회 발전과 인재육성에 이바지한 업적으로 2002년 제1회 동국청우상, 2005년 제1회 자랑스런 동국인상 등을 수상한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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