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BM-7] 삼한·삼국시대부터 광물채취 위한 터널 굴착 활발
[TBM-7] 삼한·삼국시대부터 광물채취 위한 터널 굴착 활발
  • 오원섭 사장
  • 승인 2014.01.08 09: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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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이전 도로터널 대부분 등록문화재로지정
도산 제2터널 정보드릴 반단면 굴착공법 시공

Ⅶ 한국 터널의 변천사

1. 고대부터 1910년대까지
 

 

우리나라 터널의 역사는 삼한시대(마한, 변한, 진한)와 삼국시대(고구려, 백제, 신라)의 유물인 금, 은, 동 철제그릇, 장식품, 불상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이때부터 광물을 채취하기 위해 터널을 굴착 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일본의 사적(史籍)에 백제에는 철광산이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기록이 있는바 초고왕때인 서기 181년경에 곡나철산에서 생산된 철을 일본에 수출한 것으로 되어있다.
곡나철산은 현재의 홍천철산부근 내지는 구룡철산 부근일 것으로 추정되어 이 철 광산은 모암이 석회암으로 당시 굴착방법으로는 굴진이 용이 했을 것이다. 석회암은 열에 의해 쉽게 분해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제1기인 건국 후 세종 12년까지의 40년간에는 철은 19개 읍에 민영 야철장을 설치했고 그 규모에 따라 일정량을 세금으로 징수했다. 제2기인 세종13년에서 중종 25년까지의 100년간으로서 금을 민간에게 채굴하게 하되 전량을 관용으로 매입했고 철의 산지도 82개소에 달했다. 제3기인 중종26년에서 영조8년 까지의 240년간은 각종 광물의 민간 채굴이 허용되었다.
영조 49년에서 순조 32년까지의 60년간인 제4기에는 금, 은의 채굴장이 3천여개나 되었고 5기인 순조33년에서 한 말까지의 70년간의 농경지 이외 지역에서 금, 은광을 허가 했고 세금으로 거둬들인 금 이상으로 금이 필요할 때에는 군이나 관에서 직접 채굴했다.
중종28년에 기록에 기술된 바에 따르면 광물을 캐기 위한 터널의 규모는 횡으로 약3.6m 넓이는 0.6m 길이는 0.6m 50명이 하루에 얻는 것은 3질의 쇄광, 10여말의 괴철, 몇 말의 잡철 이었다고 되어있어 중종시대의 굴진작업규모 즉 막장의 크기는 별로 크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선조30년대의 기록인 묵호고에 의하면 “단천이 개광된지 천백년이 되었는데 굴의 깊이를 헤아릴 수 없으며 왕왕 토석이 무너져 묻히고 벽이 험하고 추락되어 들어갔다가 나오지 못하는 자는 헤아릴 수 없다”고 되어있어 낙반과 추락사고가 자주 일어나 사상자가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여진다.
목민심서에 의하면 이조 시대 일반적인 굴착방법은 화흉법으로 이는 암석을 가열하고 이를 급냉시켜 균열을 형성시킨 후 에 굴착하는 방법이다. 나제통문은 전북무주군 설천면 소천리에 있는 높이 3m길이 10m의 암반에 굴착한 통문으로 옛 신라와 백제의 경제관문이었다고 전해진다.

2.1920년대~1940년대
1)도로터널
이 기관 중에는 1900년을 전후로 착공된 대규모의 철도산업을 제외하고 국내의 육상 교통 시설은 지방에서 서울로 연결되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흙 길 뿐 이였다. 1910년 한일 합병 이후 대륙침략을 위한 철도망건설에 치중하여 도로건설을 위한 터널의 수와 규모는 매우 제한적이었다.
1940년 이전 건설된 도로터널은 지역사적, 근대사적, 토목기술 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대부분이 등록문화재로 지정 되었다. 1921년 준공된 마래1터널은 길이 85m 폭 4.5m 높이 4.7m로 군량미 창고 목적으로 설계 시공되었다 동년 준공된 ‘마래2터널’은 등록문화재119호로 길이 640m 높이 4.5m 폭이 4.5m 인 차량통행용 터널이다. 1926년 군산항 개항과 함께 군산 내항과 시내를 연결하는 길이131m의 ‘군산 해망굴’을 완공했다. 경남 통영시 남단당동과 미륵도 북단을 연결하는 ‘통영해저터널’은 1932년에 완공된 동양 최초의 해저 구조물이다. 등록문화재 제201호로 지정된 이 터널은 길이 483m 폭 5m 높이 3.5m 터널이다.


2)철도터널
우리나라 철도터널은 철도건설과 더불어 발전해왔다. 1899년 경인선이 처음 개통된 후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전해 이 땅에서 물러가지 전까지 일본인 기술자에 의해 건설되었다. 1897.03.29~1899.09.18에 건설한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은 전구간에 걸쳐 터널이 없었고 최초의 터널은 1901.08. 21~1905.01.01에 건설한 경부선 서울~초량간 철도에 있는 단선터널과 1902.05.08~1906.04.03 건설한 경의선 용산~신의주간 단선 터널과 마산선 삼란진~마산간 단선터널이다.
1907~1911년간 수송능력을 증강하기 위해 노선개량 및 복선화를 추진하면서 최초 건설한 단선터널 16개소가 폐선 되어 농로 및 도로로 사용되고 있다.
용평터널은 1905년부터 1940년까지 경부선 철도로 사용되다가 현재는 차도 및 인도로 이용되고 있는데 터널높이는 약5m 길이300m 폭 3m이다.
그 후 건설된 터널은 호남선 군산선 평남선 경원선 등에 단선 터널이 계속 건설되었다.
경부선 경의선 복선건설부터 8.15광복때까지 한국 철도를 만주, 중국, 유라시아 철도와의 연결운행으로 철도수송 물량이 급증했기 때문에 철도 수송 능력을 향상시킬 필요가 있었다.


3)광산터널

기계굴진이 전국 선탄광으로 보급이 1920년대 후반에 실현되었다. 동력이 증기기관 이였기 때문에 운전효율이 안정되기 어려워 굴진속도는 저조 했을 것이다.
1930년대 후반부터는 남한지역에서도 탄광개발이 급속도로 진전되어 삼척탄광, 장성터널과 철암 사이의 전차운반터널은 전장3km복선으로 1톤 탄차가 왕래하는 대형터널도 출현했다.
화약류와 착암기 등이 사용되었고 1910년대 초기의 터널지보재는 목재이며 1920년대에는 일부 탄광에선 철제빔을 사용했다. 1940년대초에 삼척탄광의 대전차용 터널에서 터널벽과 천반을 유지하기 위해 시멘트 모르타르를 사용하는 보강방법을 사용했다.


3.1950년대~1970년대
정부 수립후 우리 기술자들이 최초로 설계시공한 철도 터널은 194903 ~1952.12.25에 시공한 현재 태백선인 쌍용 입석간 ‘입석터널(405m)’이다.
터널 단면 크기 및 형식과 굴착공법 지보공법 콘크리트 라이닝공법 모두 정부수립 이전과 같은 방법으로 했다. 노선선정 및 측량 설계시 시추등의 지반조사는 하지 않고 지형지물조사와 자연환경조사를 통하여 노선을 결정했다. 제1차 정부경제개발 계획 (1962~1966년)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5개년 단위로 계획을 수립하고 시행했다. 1962년~1981년 (제4차기간) 경제개발계획에 따라 국민 생활의 기본연료인 무연탄을 개발 수송키 위해, 황지선 통리~심포리간 8.5Km 황지지선 백산~황지간 9.0 Km, 정선선 예미~정선간 41.6 Km정선지선 정선~구절간 23.3 Km 증산~고한간 25.6 Km 고한선 고한~황지간15.0Km 경북선 예천~영주간 3.0 Km 문경선 진남~문경간 9.5 Km 경전선 진주~순천간 80.5 Km 호남선 서대전~이리간 82.2 Km복선화 등을 설계 시공했다.
또 서울지하철 1호선을 계기로 수도권전철, 경부선 서울~수원간 41.5 Km복선 전철화, 경인선 서울~인천간 38.9 Km 복선 전철화 경의선 서울~수색간 8.2Km 복선 전철화, 경원선 용산~청량리~성북간 18.2 Km복선 전철화, 중앙선 청량리~제천간154.9 Km 단선전철 태백선 제천~증산~고한~황지~백산간103.5 Km 단선전철화 영동선 백산~북평~묵호간 61.9 Km 단선 전철화 등으로 철도시설을 설계 시공하게 되었다.
도로 터널과 관련해서는 경부고속도로의 개통을 위해서 13개로 확정 상행선은1,999m 하행선은 2,052m로 총 연장 4,051m에 이른다.
이 노선 터널은 모두 2차로 1방향으로 상, 하행차로를 분리해 두 개의 터널을 병행 건설했다.
터널시공기술과 관련해서는 터널별 공법의 차이가 크게 없었던 시기이므로 자료가 잘 정리되어 있는 철도터널을 중심으로 소개하면 터널 단면크기 및 형식은 전철화를 고려하여 정선선, 정선지선, 고한선은 처음으로 제2종 마제형으로 설계했다.
이 당시 터널 굴착 공법은 인력 착암기 뚫기, 화약 발파, 목재지루식 지보공법 터널콘크리트 라이닝등 종전 공법과 큰 차이가 없었으나 구멍뚫기는 인력착압기를 기본으로 했다.
1962.5~1966.1정선선 증산~고한간 16.7 Km 철도 건설 공사에서 6개소 1,120m의 터널 중 소산 제2터널(370m)과 도사 제1터널(265m)등 2개터널을점보드릴로 철도터널에서 최초로 반단면 공법을 시험 시공하여 종래의 공법을 개선하고자 계획했다.
그러나 소산 제2터널은 지반 불량으로 점보드릴공법을 적용치 못하고 도산 제2터널은 최초 정보드릴 반단면 굴착공법인 신공법으로 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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