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설명가로서 60년을 걸어온 ‘현대건설’
건설명가로서 60년을 걸어온 ‘현대건설’
  • 승인 2007.06.27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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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 된다는 ‘캔두이즘’ 실천…건설기술 향상 선도적 기여
현대건설은 1947년 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설립한 현대토건사를 모태로 하는 국내 최대의 종합 건설회사로, 토목, 건축, 플랜트, 전기, 해양 등 건설 전 분야에 걸쳐 세계적 수준의 기술력과 풍부한 시공 경험을 보유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지난 58년 전후 복구사업의 일환인 한강 인도교 복구공사를 시작으로 고속도로, 댐, 항만 공사 등 국내 사회간접자본시설과 기간산업 건설의 중추적 역할을 수행하며 경제발전에 기여해 왔다.

또한 70년대 초 국내 최초의 고리 원자력 1호기 착공을 시작으로 국내 원전 기술력을 선진국 수준으로 끌어올려 원전 시공기술 자립도 100% 달성에 결정적 역할을 담당하는 등 국내 건설기술 향상에 선도적 기여를 해왔다.

특히 해외사업에 있어서는 지난 65년 한국 건설업계 최초로 해외에 진출한 이후 지난해 말까지 523억달러가 넘는 해외수주고를 기록, ‘대한민국 대표 건설사’의 위상을 굳건히 하고 있다.

■개척과 도전의 현대건설 건설산업의 태동과 발전

현대건설을 일컬어 개척과 도전의 상징, 한국 경제발전의 견인차라고 한다.

이는 47년 회사 창립 이래 고속도로, 댐, 교량, 아파트, 발전소, 산업단지 등 건설의 전 분야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족적을 남기며 한국 건설산업을 이끌어왔기 때문이다.

초창기였던 58년 전후 복구사업의 일환이었던 한강 인도교를 시작으로, 이후 59년 서울~수원간 및 서울~의정부간 국도를 국내 최초로 아스팔트로 시공하며 토목공사의 선두주자로 나서게 된다.

60년대 들어서는 당시로서는 고도의 기술이 필요했던 고속도로 공사에 도전, 69년 경인고속도로, 70년 경부고속도로 등 고속도로를 잇따라 완공하며 사회간접자본시설 확충에 기여하는 한편, 한국 건설기술을 진일보시키게 된다.

또한 61년 춘천댐을 거쳐 67년에는 ‘60년대 2대 토목공사’로 꼽히는 소양강 다목적댐을 완공, 댐 분야에서 독보적 역량을 구축하게 된다.

교량의 경우도 60년 초반 설계에서 시공까지 국내 건설기술로 건설한 최초의 교량인 양화대교(당시 제2한강교) 건설을 통해 장대교 대표 시공업체로 등장한 현대건설은 60년대 후반까지 굵직굵직한 장대교를 거의 독점하다시피 했다.

거제교, 강화교, 한남대교(당시 제3한강교)를 시공했고, 이후 서울대교, 잠실대교, 마포대교 등을 건설하였으며, 68년 착공한 남해대교의 경우 당시 동양 최대 규모에 달해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현대건설은 건축과 플랜트 분야에서도 한국 대표 건설사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해왔다.
61년 한국 최초의 대단위 아파트인 마포아파트 공사를 착공, 64년 완공한다.

6층 10개동 규모의 마포 아파트는 구조면에서 철근 콘크리트 라멘조로 건설, 당시로서는 널리 이용되지 않은 구조를 적용했고, 이는 향후 중·고층 주택 건설의 획기적인 전환점이 됐다.

■기술을 선도하는 현대건설 건설산업 선진화에 기여

60년대 말의 베트남 특수가 막을 내리자 현대건설은 중동 건설시장에 눈을 돌려 75년 1억3천만달러 규모의 바레인 아랍 수리조선소 공사를 수주하며 중동에 첫발을 내딛게 되는데, 동 공사는 토목 33만명 건축 26만명 전기 25만명 등 도합 90만명이 연인원이 동원된 초대형 공사였다.

이후 현대건설은 76년 20세기의 대역사(大役事)라 불리는 당시 9억6천만달러 규모의 사우디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비롯해 75년 사우디 해군기지 확장공사, 77년 바레인 디플로매트 호텔 신축공사, 쿠웨이트 슈아이바 항만 확장공사, 사우디 아시르 전력화사업 등을 잇따라 수행했다.
현대건설의 우수한 기술력을 살펴볼 수 있는 사례로 82년 착공, 85년 완공한 말레이시아 페낭대교도 빼놓을 수 없다.

총 연장 7천958m, 폭 19.5m 4차선 교량인 페낭대교는 당시 동양 최대, 세계적으로는 세 번째로 긴 다리였으며, 대교 중간의 440m는 사장교 양식으로 건설됐다.

이 공사에서 현대건설은 순수한 와이어로만 설계된 케이블을 현장에서 제작, 설치하는 신공법을 도입함으로써 국내의 교량기술을 진일보시키게 된다.

90년대 이후 현대건설은 해외건설에 있어 독보적인 역량을 더욱 강화하고 있다.

특히, 이란 사우스파 지역에서 당시 최대 규모인 총 26억달러 규모의 고부가가치 플랜트 공사인 초대형 가스 처리시설 공사를 단일 플랜트 공사로는 세계 최단기간인 35개월 만에 성공적으로 준공해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동 공사에서의 우수한 기술력과 시공력을 바탕으로 작년 사우디 쿠라이스 지역에서 가스처리시설공사를 추가로 수주했다.

특히 입찰 참가 자격 심사 요건이 까다로워 유럽 및 일본의 일부 업체만이 가능했던 사우디 국영 석유회사 발주 대형 공사를 현대건설이 원청 자격으로 수주함으로써 현대건설의 세계적인 기술력과 공사 수행능력을 다시금 인정받는 계기가 됐다.

이밖에 최우수 건물 설계상을 수상한 95년 착공한 싱가폴 선텍시티 5단계 공사, 일부 유럽 회사들이 독점했던 준설/매립 공사에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계기가 된 96년 착공한 싱가폴 창이 매립공사, 02년 착공한 쿠웨이트 New Oil Pier 공사 등, 현대건설은 그간 국내 건설업체들이 수행하지 않았던 분야에 대부분 국내 최초로 진입하는데 성공했다.

아울러 국내 원전 건설의 역사는 곧 현대건설의 원전 개척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현대건설은 70년대 초 고리 원전 1·2호기를 시작으로 국내 원전 20기 중 총 12기를 건설하고, 특히 81년 착공한 영광 원전 1·2호기를 비롯해 96년 착공한 5·6호기까지 영광 원전을 한국형 원전으로 건설하며 국내 원전기술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한편, 현대건설은 2003년 1천MW급 원자로 설비 2기를 신설하는 신고리 원전 1·2호기를 수주, 현재 시공 중에 있으며 올 2월 국내 최대 발전 규모인 1천400MW급 원자로 설비 2기를 신설하는 신고리 원전 3·4호기도 수주, 원전 건설을 주도하고 있다.

또한 청계천 복원 공사, 성수대교 복구 공사를 비롯해 국내 최대 컨벤션센터로 강남 일대 랜드마크가 된 아셈타워 등 국내에서도 수많은 공사를 수행하며 건설산업 발전을 이끌고 있다.

■미래로 도약하는 현대건설

올해로 창립 60주년을 맞은 현대건설은 ‘미래를 향한 도전과 성장’을 경영목표로 정하고, 미래역량 강화, 기업가치 제고, 책임경영을 3대 실천목표로 설정, 이를 추진하고 있다.

현대건설은 지난 60년간 ‘하면 된다’는 ‘캔두이즘(Candoism)’ 실천을 통해 한국경제의 이념적 철학을 이룩한 한국 대표 건설사이자 세계 유수의 건설사로 위상을 유지해왔다.

현대건설은 앞으로도 ‘창조적 예지’, ‘적극 의지’, ‘강인한 추진력’을 바탕으로 국내건설산업 발전을 선도하며 세계적인 초우량 건설사로 거듭날 계획이다.

한국 건설산업 60년이 현대건설이 있어 가능했다면 이제 한국 건설산업의 100년도 현대건설이 어떤 활약을 보여줄지에 달려 있다고 기대해볼 수 있을 것이다.

-시공일화

■대한민국의 대동맥, 경부고속도로 건설 (68.1~70.7)

현대건설은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대한민국 유일한 고속도로 건설 유 경험업체로 경부고속도로 건설의 대표사의 중책을 위임받았다.

당시 공사비로 건설부 6백50억 원, 서울특별시 1백80억 원, 재무부 3백30억 원, 육군 공병감실 4백90억 원, 현대건설 2백80억 원을 각각 제시했다.

이 중 현대건설과 재무부의 안을 절충하여 3백억 원에 10% 안팎의 예비비를 얹어 일단 3백30억원으로 총건설비를 선정했다.

나중에 노선변경, 물가상승과 토지 매수대금 등으로 인해 1백억 원이 추가되어 총건설비는 4백30억 원이 들었다.

이 건설비는 1967년 국가 전체 예산의 23.6%에 달하는 규모였다.

‘공기를 앞당기자’라는 목표를 갖고 8백만 달러어치, 1천9백89대의 최신 중장비(1965년 말 현재 국내 민간 건설업체 보유 총 장비 수는 1천6백47대), 인부 약 5백40만 명에 기능공 약 3백60만 명, 도합 9백만 명에 이르렀다.

경부고속도로는 2/5를 현대건설이 시공했고, 나머지는 15개 국내 건설업체와 육군 건설공병단 3개 대대가 참여했다.

현대건설은 현장에서 항상 현장 작업차가 최우선이다.

‘호랑이 정주영’은 물론이거니와 한 번은 박정희 대통령이 탄 지프에도 중단없이 일을 계속하여 대통령이 덤프트럭에 길을 비켜주었다고 한다.

그 후 현장에서는 트럭 기사가 ‘대통령보다 쎈 사람’으로 통했다.

■모래의 힘 : 소양강댐공사(68.4~73.10)

소양강댐공사는 대안제도가 국가적으로 정착되기 앞서 성과를 거둔 주요공사 중에 하나다.

당시 우리나라 댐공사의 현실은 외국 기술을 들여다 하는 상황이었다.

소양강댐의 경우도 일본공영이 콘크리트 중력공법을 제시하였고 발주처의 입장에서도 현대가 제시한 사력댐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이었다.

현대가 사력댐을 제시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콘크리트댐의 경우 설계비에 기초 자재비, 기술 용역비는 물론 철근, 시멘트, 엄청난 물량의 기자재 값까지 일본에 고스란히 넘어가게 되는 상황이었고, 뿐만 아니라 수입해 들여온 물량을 그 산간벽지까지 수송하는 운반비용도 엄청나게 들게 생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사현장 주변에 널려있는 자갈과 무진장한 모래를 이용하여 경제적으로 건설할 수 있었고 암반에 부담도 적었다.

당시 1백m가 넘는 댐의 세계적인 추세도 사력댐이었다.

■아시아 최장의 다리, 13.5km 페낭대교 수주(82.1~87.7)

페낭대교의 건설은 마하티르 총리가 부총리일 때 건설 계획을 발표한다.

큰 공사의 계획이 발표되면 수많은 나라의 건설회사들이 건설을 따내기 위해 치열한 정보전을 벌이게 된다.

이 정보를 입수한 현대건설은 좀 늦었지만 책임자로 정몽준 사장을 보내게 된다.

정몽준은 총리를 만나기 위해 시도하지만 이미 일본 미국 독일 등의 로비스트들의 공작으로 총리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채 상심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 당시 부총리였던 마하티르 부총리를 만나게 된다.

“이미 로비를 해서 입찰을 따내기에는 늦었다. 만약 내가 총리가 된다면 그대를 도와주겠다. 그러니 지금은 돌아가 있으라."

그 당시 정몽준은 마하티르 부총리와 관계를 다지며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페낭대교의 건설은 이미 다른 나라에서 확정되어진 시점.

우연하게도 그 당시 총리가 쓰러지게 된다. 그래서 결국 부총리였던 마하티르가 총리직을 맡게 되는 일대 사건이 벌어진다.

어느 날 정몽준은 한 통의 전화를 받게 된다. 마하티르 총리의 전화였다.
“미스터 정, 할말이 있으니 일단 오게나."

·마하티르는 정몽준에게 4가지 조건만 들어 준다면 현대건설에 페낭대교의 건설을 맡기겠다고 했다.
① 대한항공의 말레이시아 입점.
② 말레이시아의 자국차 생산을 위한 기술전수.
③ 다리 건설로 인해 파생되는 이익금의 10% 정부 지원.
④ 2년6개월 내 건설.

어느 것 하나 쉬운 게 없는 조건이었다.

정몽준은 일단 한국으로 돌아와 4가지 조건을 들어 주기 위해 첫 번째 대한항공 회사 측과 면담을 벌였다.

하지만 계산기를 아무리 두들겨도 적자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말레이시아의 공항 입점을 대한항공은 일언지하 거절하게 된다.

나머지 3가지 조건 중 두 가지는 이미 정주영 회장의 승인이 떨어진 시점.

자동차의 기술 전수는 미츠비시사에 의뢰해서 3가지 조건을 충족하게 된다. 현대 자동차는 그때 당시 기술을 전수할 만한 자동차 기술이 없었다.

마하티르 총리에게 전화를 건 정몽준은 한 가지를 제외한 3가지 조건을 말했지만 마하티르는 결과를 기다리라는 말만 듣고 기다리게 된다.

마하티르 총리실 앞에 기다리던 정몽준은 비서로부터 말을 듣게 된다.

“차를 대접하게 될 것입니다. 커피를 내온다면 입찰에 실패이고 인삼차를 내온다면 입찰에 성공한 것으로 알면 됩니다."

넓은 방에서 기다리던 정몽준은 멀리서 내오던 인삼차의 냄새를 맡게 된다.

■페낭대교의 건설

2년 6개월 동안 공사를 마쳐야 하는 페낭대교 건설은 시작부터 난간에 부딪힌다.

뭐든지 빨리빨리하는 성격 급한 한국인과는 완전히 다르게 말레이시아 인부들은 느긋하기 짝이 없었다.

또한 이슬람의 국교를 가진 그들은 일하다가 말고 2~3시간씩 기도하기 일쑤였고 밥을 먹을 때는 1시간 이상이 걸렸다.

이대로 한다면 2년6개월은커녕 4년이 지나도 건설을 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정몽준은 정주영 회장에게 전화를 한다.

긴급회의를 소집한 정주영은 딱 한마디를 하게 된다.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서 보내면 되잖아"

이 당시 간부들이 속으로 정주영 회장의 은퇴를 생각할 정도로 뜬금없는 말이었지만 결과는 한국에서 다리를 만들어 커다란 바지선을 통해 나르게 된다.

■새만금 방조제 공사(92.5~06.4)

현대건설이 2006년 공사 시작 14년 만에 가력도와 신시도를 잇는 방조제 양 끝을 잇는 최종 끝막이 공사를 완료, 대역사의 금자탑을 쌓았다.

한국농촌공사가 발주한 새만금 간척공사는 총 공사비가 2조1천933억원에 달하는 초대형 국책사업으로, 지난 1992년 6월 첫 삽을 뜬 이래 전북 군산시와 김제시 부안군 양안(兩岸)을 잇는 방조제 공사를 해왔다.

드디어 13년 10개월 만인 4월 21일 현대건설이 방조제 양 끝을 잇는 최종 끝막이 공사를 완료함으로써 한국 건설사에 또 하나의 대역사를 기록하게 됐다.

새만금 간척공사는 방조제 길이가 총 33km에 달해 세계 최장의 길이를 자랑하며, 방조제에 들어간 토석량은 총 7천300만㎥로 소양강댐 8개를 축조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양이다.

또한 간척공사로 조성되는 토지는 여의도 면적의 140배에 맞먹는 8천500만평에 이르며, 간척지 내에 조성되는 새만금호는 3천500만평 규모에 저수용량이 5억3천452만 톤에 달한다.

현대건설은 새만금 간척공사의 주공사인 방조제 공사 33km 중 2공구 9.9km를 시공했을 뿐만 아니라 공사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최종 끝막이 공사를 마무리함으로써 그간 서산 간척지 A·B지구, 싱가포르 주롱&투아스 공사 등을 통해 인정받아온 매립·항만 분야의 독보적인 기술력과 풍부한 시공경험을 다시금 인정받는 계기가 되고 있다.

특히, 현대건설은 새만금 방조제 공사시 빠른 유속 등을 감안해 약 3톤에 달하는 돌을 돌망태로 묶고, 이를 다시 4개씩 묶어 총 12톤의 돌망태로 제작, 육상 투하 외에도 평바지선과 저개식 바지선을 이용해 투하함으로써 성공리에 공사를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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