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력적 사업수행모델(CDM), 원칙이 뿌리내릴 제도부터 만들어야
현재 국내에서는 적극적 사업관리 유인이 제대로 실현되지 않아 관련 법령 정비 및 시범사업 통해 모델이 실제 작동될 환경 구현
최근 유럽해외건설협회(European International Contractors, EIC)가 내놓은 '협력적 사업수행모델(Collaborative Delivery Models, CDM) 포지션 페이퍼'는 유럽 건설산업이 처한 위기를 숫자로 드러낸다. 대형 프로젝트의 98%가 공기 지연이나 예산 초과를 경험했고, 2020년 이후 자재비는 50% 이상 뛰었으며, 시공사의 평균 순이익률은 제조업의 5~10%에 한참 못 미치는 1~2%에 머물러 있다.
최저가 낙찰과 설계·시공 분리, 일방적 리스크 전가로 대표되는 전통적 발주 방식으로는 더 이상 양질의 인프라 구축이 어렵다는 문제의식이 유럽 업계 전반에 번지고 있는 것이다.
EIC가 대안으로 제시한 CDM은 조기 계약자 참여(Early Contractor Involvement, ECI), 얼라이언싱(Alliancing), 점진적 설계-시공 방식(Progressive Design-Build, PDB) 등을 아우르는 개념이다.
명칭은 저마다 다르지만 공통된 원칙은 뚜렷하다. 발주자·설계자·시공자가 사업 초기 단계부터 하나의 팀으로 묶여 목표를 공유하고, 가격이 아니라 기술력과 리스크 관리 역량으로 계약자를 뽑으며(Most Economically Advantageous Tender, MEAT), 원가를 투명하게 공개하는 오픈북 회계를 전제로 리스크와 성과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이런 원칙들은 낯설지 않다. 미국에서 오래 뿌리내린 CM at Risk나 통합사업수행방식(Integrated Project Delivery, IPD)이 이미 같은 철학 위에 서 있고, 국내에서도 2016년 무렵부터 '시공책임형 건설사업관리'라는 이름으로 이를 들여온 지 10년이 돼 간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국내 시공책임형 CM의 실제 운영 실태를 들여다보면, 해외에서 이 방식의 핵심으로 꼽히는 요소들이 상당 부분 빠져 있다.
LH가 단지 분야에 적용해 온 시공책임형 CM에 대한 최근 평가만 보아도, 제도 도입의 근거가 되었던 원가공개(오픈북) 정책은 시행되지 않고 있고, 계약상대자의 기본설계 단계 조기 참여나 조기 착공도 사실상 막혀 있다.
공기를 단축해도 인센티브가 없고, 시공계약 단계의 협상 절차조차 갖춰지지 않아 애초 이 제도가 지향했던 '적극적 사업관리 유인'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온다.
결국 이름은 CM at Risk이지만 리스크 분담 구조는 설계·시공 분리 발주 시절과 크게 다르지 않은, '무늬만 CDM'이 되어버린 셈이다.
이는 특정 제도 하나가 부실하게 설계된 탓이라기보다, 우리나라 건설산업의 발주방식을 결정하는 근간이 되는 발주제도의 근본 체계 때문이다. 국가계약법을 비롯한 공공 발주·계약 관련 법령은 가격 중심의 경쟁 입찰과 사업 조건별 획일적 발주 방식을 골간으로 짜여 있다.
협상에 의한 계약자 선정, 설계 진행률에 연동한 목표공사비(GMP) 확정, 목표 달성 시의 수익 공유 같은 CDM의 핵심 장치들은 이 골간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그러다 보니 해외의 얼라이언싱이나 ECI를 그대로 옮겨오려 해도, 결국 기존 법령이 허용하는 틀 안에서 형식만 취하고 핵심은 덜어낸 채 정착하기를 반복하게 된다. 시공책임형 CM이 걸어온 길이 바로 그 증거다.
건설산업의 구조적 위기에 대응하겠다며 협력적 계약 방식을 들여오는 일은 이제 선택이 아니라 방향이 된 듯하다. 그러나 방향이 옳다고 해서 이식이 저절로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CDM이 실제로 작동하려면 원가공개를 전제로 한 신뢰 기반의 정보 공유, 협상에 의한 계약자 선정과 수의계약을 인정하는 계약 체계, GMP와 수익 공유를 뒷받침하는 회계·정산 규정처럼 제도의 '뿌리'에 해당하는 부분부터 손을 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국토교통부와 기획재정부, 발주기관, 건설업계, 학계가 함께 참여하는 범부처 협의체를 통해 국가계약법 등 관련 법령의 정비 방향을 논의하고, 시범사업을 통해 계약자 선정 방식과 리스크·수익 분담 기준을 구체화하는 단계적 접근이 필요하다.
해외에서 성과를 낸 발주 방식의 이름과 절차만 들여와서는 같은 성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원칙이 뿌리내릴 토양, 즉 제도적 기반을 함께 정비하지 않는 한 CM at Risk도, CDM 철학에 기초한 얼라이언싱이나 ECI 체계도 우리 발주 체계 안에서 또 한 번 변질된 이름으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지금이야말로 협력적 사업수행모델의 원칙이 실제로 작동할 수 있는 법·제도적 기반을 진지하게 논의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