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BM 국산화 및 기술 자립화를 위한 정책적 방안
국내 독자 기술 없이는 비용 증가 및 기술 종속 우려돼 정부 차원의 기술 개발 지원 및 전략 수립이 필요한 때
우리나라는 지하 공간 활용과 인프라 확충 수요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대도시 광역교통망(GTX 등) 건설, 고속철도·고속도로 지하화, 전력·상하수도 관로 구축 등 다양한 분야에서 터널 보링 머신(TBM) 공법 적용이 확대되는 추세다.
TBM은 원통형 굴착기를 이용해 암반을 압력으로 파쇄하며 연속 굴진하는 장비로, 기존 발파 위주의 NATM 공법 대비 소음과 진동이 적고 굴착 속도가 빨라 도심 지역에서도 안전하고 신속하며 친환경적인 시공이 가능하다.
이러한 장점 때문에 OECD 주요국 대규모 해저터널 공사의 90%가 TBM을 활용하고 있으나,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NATM 의존도가 높아 TBM 채택률이 한 자릿수에 불과한 상황이다.
그러나 최근 도심지 민원 최소화와 공기(工期) 단축을 위해 TBM 수요가 급증하면서 장비 국산화의 필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현재 국내 중·대단면급(직경 7~14m) TBM 설계·제작 기술은 거의 전무해 100% 해외 기술에 의존하는 실정이다.
실제로 김포-파주 한강하저 터널에 투입된 직경 14m TBM도 독일 헤렌크네히트(Herrenknecht)사의 장비이며, 이외에도 미국 로빈스, 일본 미쓰비시, 중국 CREG· CRCHI 등 외국 제조사들이 국내 시장을 사실상 장악하고 있다.
이로 인해 TBM 한 대당 200~700억 원에 이르는 막대한 비용이 해외로 유출되고 있으며, 정밀기계의 핵심기술을 타국에 의존함에 따른 기술 주권 침해 우려도 큰 상황이다.
TBM은 전 세계 6~7개국만이 보유한 고난도 융합기술 장비로, 국내 독자 기술 확보 없이 장기간 수입에 의존할 경우 장비 조달 비용 증가와 기술 종속이 지속될 것으로 우려된다. 따라서 안정적 인프라 구축을 뒷받침하고 미래 건설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TBM 장비의 국산화와 기술 자립화가 반드시 필요하다.
■ 해외 기술 의존에 따른 리스크 사례
전량 수입에 의존하는 TBM 장비는 사업 일정과 유지관리 측면에서 여러 리스크를 수반한다. 일례로 앞서 언급한 한강 하저 도로터널 공사의 경우 국산 대구경 TBM의 부재로 독일에서 장비를 조달하는데 상당한 비용과 시간이 투입됐다.
이처럼 핵심 장비 수급을 해외에 맡길 경우, 제조사의 생산 일정 지연이나 글로벌 물류 차질로 국내 프로젝트 착공이 미뤄지는 도입 지연 위험이 항상 존재한다.
실제로 TBM은 주문 제작에 수개월 이상 소요되는 대형 장비이기에, 제때 수입하지 못하면 터널 공사가 장기간 표류하는 사태도 발생할 수 있다.
또한 유지보수의 어려움도 큰 문제다. TBM 운용 중 커터헤드나 메인베어링 등 주요 부품에 고장이 발생하면, 해당 부품을 해외 본사로부터 공수해야 하므로 수리 기간이 길어지고 비용이 급증한다.
현장에는 고가의 예비부품을 충분히 비축하기 어렵고, 외국 전문인력을 급파해야 하는 경우도 잦아 공사 다운타임(중단시간)이 늘어나며, 국내 건설사의 한 관계자는 "TBM 구매와 유지에 필요한 충분한 비용 지원이 이뤄지지 않아 하도급사들이 장비 조달에 부담을 느낀다"고 토로한 바 있다.
이처럼 부품 수급 불안정과 기술지원 지연은 실제 터널 공사 기간 연장과 추가 비용 발생으로 이어져 발주처·시공사 모두에게 피해를 준다. 나아가 잦은 문제 발생 시 국내 발주처들이 TBM 공법 적용을 꺼리게 되어, 결과적으로 첨단 기술 도입이 위축되고 국내 업체의 기술 축적 기회도 사라지는 악순환을 초래한다.
■ 국내 TBM 기술 개발 현황
지금까지 국내에서는 터널 시공에 발파식 NATM의 비중이 높았고 TBM 활용이 제한적이어서 관련 제조 산업도 더딘 발전을 보였으나, 최근 중소 전문기업들을 중심으로 소구경 TBM 국산화의 성과가 일부 나오고 있다.
이엠코리아(EMK)는 일본 타이코텍스사의 기술을 이전받아 지난 2014년 한국형 세미쉴드 TBM 개발에 성공한 후, 구동부까지 자체 기술로 제작한 TBM 8대를 현장에 공급했다.
강릉건설은 보다 고난도인 실드 TBM 국산화에 성공하여 지금까지 총 11대의 TBM을 제작했고, 특히 전량 국산 기술로 만든 TBM을 북안산 전력구 터널 공사에 투입해 현장 트러블 없이 가동되는 성과를 거두었다.
최근에는 지반 전문기업 동아지질도 일본 Ugitec과 협력해 국산 TBM 1호기를 부산 에너지 터널공사에 투입했고, 후속 장비를 제작 중이다.
또한 지난 2021년 설립된 티엔엠(T&M) 역시 일본 JIMT사와 기술협약을 맺고 TBM 자체 제작에 나서는 등, 국내에서 직경 3m급 소단면 TBM 분야에 한해 여러 업체가 개발 역량을 갖추고 있다.
이들 업체는 국토교통부로부터 건설기계 제작·조립자 인정서를 취득해 핵심 구동부까지 국산 설계·제작이 가능함을 공식 인정받았는데, 이는 국내 TBM 기술 자립의 초석이 되는 성과다. 다만 이러한 시도들은 직경 3~5m 수준의 소규모 TBM에 국한되어, 지하 철도나 해저터널에 필요한 중·대형 TBM은 여전히 개발 공백 상태다.
한편, 대형 건설사를 중심으로 TBM 적용 경험과 기술축적 노력도 이어지고 있다. 현대건설은 국내 최초로 한강 밑을 통과하는 도로터널에 TBM 공법을 고집스럽게 적용해 첨단 디지털 기술이 집약된 시공을 선보인 바 있다.
이에 현장 소장 또한 "이번 공사 TBM도 독일에서 상당한 비용을 들여 빌려온 것이므로, 궁극적으로 장비 국산화가 필요하다"고 발언, 이처럼 수요기업 측 인식 변화와 현장 노하우 축적은 향후 TBM 국산화 추진에 중요한 자산이 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정부 차원의 기술 개발도 진행 중이다. 국토부와 국토교통과학기술진흥원(KAIA)은 지난 2015년 이후 TBM 핵심 부품·장치 국산화를 위한 R&D를 단계적으로 추진, TBM 커터헤드 설계자동화 시스템과 운전·제어시스템 국산화 등을 달성했다.
그리고 2025년부터는 약 7년간 중·대단면 K-TBM 개발을 위한 국가 연구개발사업을 본격화하고자 준비하고 있으며, 국내 최초로 직경 7~14m급 TBM 완제품 제작 및 성능검증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번 사업을 통해 중대형 TBM 핵심기술 국산화율 70% 달성, TBM 시공 다운타임 30% 저감, 테스트베드 구축 및 장비 인증체계 마련 등이 추진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다만 업계에서는 "국내 TBM 프로젝트 발주량이 워낙 적어 기업들이 수익을 담보하기 어려우며, 민간의 적극적 참여를 이끌어내려면 정부의 지원과 내수시장 창출이 병행돼야 할 것"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 TBM 국산화 및 기술 자립화를 위한 정책 지원 방안
TBM 장비의 국산화는 단순한 한 기업의 문제가 아닌, 국가 기간산업 육성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정책입안자와 건설업계 의사결정자의 결단과 지원이 뒷받침될 때 우리 기업들의 기술 역량 축적과 자립화가 가능한 것이다.
먼저 현재 착수된 K-TBM 개발사업을 차질 없이 수행하고, 추후 지능형 TBM, 원격제어·자동화, 소재 경량화 등 차세대 기술까지 아우르는 중장기 기술 로드맵을 마련해야 한다.
TBM 핵심기술을 전략기술로 지정하여 일관된 예산 지원과 지속적인 성과 관리가 필요한데, 선진국 대비 아직 30% 수준에 불과한 국내 기술력을 고려하면 10년 내 세계 최고 수준 TBM 기술 보유를 목표로 단계별 세부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연구개발 과정에서는 대기업-중소기업-연구소-대학교 간 컨소시엄 협력을 촉진해 시너지를 높이고, 개발된 기술이 사장되지 않도록 실용화까지 책임지는 추진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또한 새로운 TBM 기술이나 시제품이 개발되면 이를 현장에 적용해 검증할 시범 프로젝트를 지정해야 한다. 예를 들어 국가 주도로 진행되는 도심 대심도 터널이나 지자체의 지하 인프라 공사 중 일부 구간을 TBM 국산화 기술 실증사업으로 선정하는 것이다.
시범사업으로 지정된 구간에는 국산 TBM 장비를 우선 적용하도록 하고, 만일 초기 성능 미흡으로 공기가 지연되더라도 불이익을 면제하여 시험 기회를 보장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관련 법령 및 계약조건을 정비하고, 필요시 공사기간 연장이나 비용 보전을 정부가 지원함으로써 건설사가 안심하고 국산 장비를 활용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아울러 TBM 테스트베드와 인증센터를 설립해 시범 적용 전후 장비 성능을 체계적으로 측정·평가하고, 그 결과를 기술 개선에 환류시키는 선순환 체계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
이와 더불어 공공 발주 단계에서부터 국산 TBM 활용을 장려하는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 입찰 평가 시 국산 인증 TBM 적용 계획을 제시하는 업체에 가산점을 부여하거나, 기술제안형 입찰에서 국산 장비 활용도를 평가 항목에 포함시키는 방안을 검토할 수 있다.
또한 TBM 장비 비용이 적정하게 반영되도록 발주 예산 산정 방식을 개선하고, 원도급사가 TBM 등 고가 장비의 임대·구매비를 별도 항목으로 계상해 하도급사에 충분히 지급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초기 국산 TBM 적용에 따른 리스크를 보전하기 위해 보험료 지원, 임대료 보조 등의 인센티브도 제공할 필요도 있다. 특히 시범사업의 경우 성능 안정성이 입증되면 완공 시 포상이나 추가 보상을 지급해 참여 기업의 사기를 높이고, 민간부문에서도 국산 TBM 활용이 경제적으로 이익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TBM 기술 자립을 위해서는 단일 장비 개발을 넘어 관련 산업 전반의 생태계 구축이 뒷받침돼야 한다. 국산 TBM에 대한 공인 인증제도를 마련해 성능·안전 기준을 충족한 장비임을 객관적으로 증명하고, 국내외 발주처가 안심하고 채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현재의 건설기계 제작자 인정서 제도를 발전시켜 향후 개발될 중·대형 TBM까지 아우르는 종합적인 인증체계를 수립할 필요가 있으며, TBM 구성품의 표준화와 국산 부품 공급망 구축을 지원해야 한다.
예를 들어 커터헤드, 실링가스킷, 유압장치 등 소모품이나 주변장치에 대한 표준 규격을 정하고, 이를 생산할 국내 부품업체를 육성함으로써 상시적인 부품 수급망을 갖추는 것이다.
정부 또한 관련 중소기업에 대한 기술 개발 자금과 세제 혜택을 제공해 참여를 독려할 수 있으며, 권역별로 TBM 유지보수 전문센터를 지정해 장비 운용 교육, 정비 인력 양성, A/S 서비스를 지원하는 것도 고려해볼 만하다.
국산 장비의 초기 신뢰성을 확보하려면 제조사와 별개로 제3자의 유지보수 인프라가 필요하며, 이를 통해 장비 수명주기 전체를 책임지는 지원 체계가 완성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안정적인 내수 시장 형성이 TBM 국산화의 성패를 가른다. 연간 발주 물량이 1~2건에 그쳐서는 기업들이 거대한 TBM 개발에 투자할 유인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정부와 공공기관이 중심이 돼서 향후 10년간 예정된 터널 공사 계획을 면밀히 분석하고, 가능한 범위에서 TBM 공법 적용을 확대하는 시장 창출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
예를 들어 GTX 노선 터널, 대심도 지하도로, 상하수도 및 전력구 등 비교적 연약지반을 통과하는 프로젝트에는 TBM 적용을 우선 검토하도록 행정지침을 내릴 수 있다.
원희룡 前 국토부 장관도 "앞으로 착공할 GTX-B·C와 기획 중인 GTX-D·E·F 노선 터널에 TBM을 가급적 많이 도입하겠다"고 발언하며 향후 국내 TBM 수요가 크게 늘 것으로 전망되고 있으며, 이렇게 예측 가능한 수요가 뒷받침되면 민간 기업도 인력·설비에 적극 투자해 기술을 고도화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또한 정부는 국내에서 실적을 쌓은 TBM 기업들이 해외 시장에도 진출할 수 있도록 수출 지원에도 나서야 한다. 초기에는 해외 유사 기술 보유 업체와 컨소시엄으로 참여하거나, 개발도상국 터널 사업에 우리 K-TBM을 공급하는 방안을 모색할 수 있다.
장기적으로 국산 TBM 기술력이 축적되고 규모의 경제를 이루면 가격 경쟁력도 향상, 국내 시장을 넘어 세계 TBM 시장에서 새로운 강자로 부상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 결론
TBM 장비 국산화와 기술 자립화는 단기간에 이루어질 과제가 아니며, 정부와 산업계의 장기적 비전과 협력이 요구된다. 다행히 정부도 TBM 기술의 전략적 중요성을 인식하여 기준 정비와 산업 생태계 조성 의지를 천명한 바 있다.
원희룡 前 국토부 장관은 "설계기준과 국가기준을 개선하고 자체 부품 생산·제작 등 산업생태계를 조성해 세계적인 TBM 기술 보유국으로 거듭나겠다"고 공언했으며, 이것이 실현되려면 지금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지속적인 정책적 뒷받침과 민관의 투자가 이루어진다면 머지않아 우리도 초대형 TBM을 자체 기술로 제작·운영하며, 국내 인프라 구축의 비용 절감과 일정 단축, 나아가 글로벌 TBM 시장 선도라는 결실을 맺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국산 TBM 개발에 대한 과감한 지원과 체계적인 전략 수립을 통해, 터널 굴착 분야에서의 기술 주권 확립을 앞당겨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