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정원도시의 시대
지금은 정원도시의 시대
  • 김태경 한국조경학회장
  • 승인 2024.05.08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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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의 도시계획은 산업화 당시 추진된 '하향식' 정책들
'가드닝시티' 등 시대 변화 반영한 새 도시정책 수립 필요
김태경 한국조경학회장.
김태경 한국조경학회장.

■ 도시는 산업혁명으로 만들어졌다.
몇 년 전부터 국가는 스마트시티를 만드는데 많은 에너지를 투입하고 있는데, 그 시작은 산업혁명에서 찾아야 한다. 방직기계의 발명으로 해가 지지 않는 영국을 만들었던 빅토리아 시대는 환경오염으로 인해 평균수명 30세를 넘기지 못하는 보복을 당했다. 이에 대해 하워드(E. Howard)는 전원도시(garden city)를 제안하였고, 이상안이기는 했었으나 웰윈(Welyne)과 같은 실제 도시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후 앞선 계획들의 단점을 극복하고자 수시로 새로운 개념의 도시안들이 생겨났다. 근린주구의 개념이나 기능성을 최고의 기준으로 했던 모더니즘 도시, 효율성을 강조했던 축소고밀도시(compact city), 사람과 환경이 조화롭게 공생하는 생태도시 그리고 지금의 탄소중립도시 등이 환절기에 옷을 갈아입는 듯 등장했고 나름의 역할을 한 후 쇠퇴했거나 진행 중에 있다. 
여기에 우리에게는 정치적인 목적이 물씬 풍기는 ‘기업도시’, ‘혁신도시’, ‘녹색도시’ 등이 있었고, 현재는 ’똑똑한 도시(smart city)‘를 만드는데 밤낮이 없다. 이들의 공통적인 특징 가운데 하나는 사회개혁가(?)나 도시전문가 혹은 정부에서 제안하거나 추진했던 하향식 정책이었고, 또 다른 것을 찾는다면 인구가 증가하는 시대의 산물이었다는 점이다.

■ 공원은 시민혁명의 유산이다.
조경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정착하는데 50여년의 시간이 지났다. 회색 국토가 대세였던 건설 중심의 개발시대에 공원의 양적 확대를 주도하면서 한 줌의 녹색 땅이라도 지키려 진땀을 흘렸던 긴 시간이었다. 청와대 경제1부속실에서 산림분야의 한 축으로 시작된 조경이 건설분야로 분류되면서 현재는 국토교통부의 관할대상이기는 하지만 조경의 DNA에는 산림청의 업역도 상당부분 겹쳐 있다고 하겠다.
조경은 우리나라에서 사용하는 용어이고 원어인 ‘landscape architecture’는 미국인 저널리스트였고 훗날 조경의 아버지가 된 옴스테드(F.L.Olmsted)가 만들어낸 당시의 신조어였다. 그가 공원이라는 사회기반시설을 세계적으로 확산시키는데 결정적 계기를 제공해주기 전까지는 정원이 3,000년 이상의 시간을 대신하고 있었다. 
결국 ‘국민’, ‘시민’, ‘민중’, ‘인민’이라는 인식을 만들어준 파리 시민혁명을 생각하면 공원은 그것의 중요한 결과물 중 하나였고, 우리도 개발의 시대에 도시의 기반시설로서 공공의 정원을 만들고 있던 것이다.

■ 정원과 공원, 다른 시대에 태어난 쌍둥이
역사의 측면에서 공원을 공부하게 되면 인간시계의 90%는 정원이 차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창세기의 에덴동산부터 많은 왕들과 귀족들 그리고 종교인들이 만들어 놓은 정원이 공원을 잉태하고 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정원이 별개의 시설이 되어 산림청의 업역 확장을 주도하는 사업이 되었다. 
정원은 시작할 당시만 해도 순천만의 지킴이였으나 후에 산림청으로부터 국가정원이라는 직위를 받으면서 공원과는 다른 도시의 시설이 되었다. 실제의 내용을 보면 공원과 그리 다르지 않고, 이곳에 들어온 국민들 입장에서는 굳이 공원과 정원을 구분할 필요도 없으며 테마파크의 하나인 ‘정원’으로 인식하고 있다. 
국가정원을 비롯한 몇 유형의 정원이 정원법에 명시되면서 많은 자치단체에서는 국가정원을 목표로 지방정원을 경쟁적으로 조성하고 있고, 또 보폭을 넓히면서 정원도시가 되기 위해 사활을 건 모습도 보이고 있다. 그렇지만 정원도시라는 이름의 계획안을 보면 과거의 많은 도시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 깊이 고민해야할 문제이다.

■ 가든시티보다는 가드닝시티로
현재의 상황을 보면 국토부에서는 스마트시티를, 산림청에서는 가든시티를 동시에 추진하는 모습인데, 문제는 두 유형 사이에는 수단에서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100년 전의 가든시티는 협동적사회주의+소규모촌락공동체+도농결합이라는 자족적 기능을 갖춘 도시였기에 지금의 정원도시와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원은 자신이 직접 만들고, 키우고, 관리하는 곳이기에 몸을 사용해야 하고 그렇기에 정확히는 가든(garden) 시티보다는 가드닝(gardening) 시티가 되어야 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스마트시티는 첨단기술을 사용함에 따라 편리성과 효율성이 핵심이고 온라인적 특성이 강하다. 지역소멸의 시대에 만드는 도시는 인구증가의 시대에 유용했던 하향식과는 반대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 인구유지의 기본사항으로 지역민들이 지역을 지켜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지역에 대하여 강한 자부심을 줄 수 있어야 한다. 
루이 14세와 베르사유 궁원까지 올라가지 않더라도 최근의 개인정원들을 보라. 그들에게 정원은 자신의 얼굴이고 자부심 그 자체이다. IT나 AI 등의 첨단기반의 세상 이면에 생기는 어쩔 수 없는 소외층의 그늘을 생각하면 몸을 사용하는 가드닝이 경쟁재나 대체재가 아닌 보완재로서의 가능성이 충분하다.

현 정부의 국가건축위원회는 ‘공원 같은 국가, 정원 같은 도시’를 표방하였다. 정말 그럴 수 있을까? 오늘 우리의 문제는 인구절벽에 의한 도시소멸이다. 
과거의 많은 유형의 도시들은 인구가 증가함으로써 벌어진 문제를 해결하는 대안들이었다. 이제는 완전히 반대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기에 과거의 방식은 어제의 시간에 묻어 두고 새 길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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