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 디딜 틈’ 없는 도시는 이제 그만, 우리는 걷고 싶다
‘발 디딜 틈’ 없는 도시는 이제 그만, 우리는 걷고 싶다
  • 황순호 기자
  • 승인 2021.12.29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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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AURI 건축도시포럼’ 통해 보행도시 실현방안 모색
차도와 보행도로 분리로 시민 ‘보행권’ 확보 노력 필요
도시계획 수립에 있어서도 보행권 최대한 반영해야

“우리네 도시는 정말이지 ‘발 디딜 틈’이 없다. 그나마 대로변은 차도와 인도가 분리돼 있어 인도 위를 걸어가면 된다지만, 골목으로 조금만 들어가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인도이고 차도인지 알 수 없는 경우도 허다하다.

인도 위를 잘 걷고 있다가도 도중에 인도가 끊어지거나, 주・정차된 차량이나 갖가지 장애물 등으로 인도가 막혀 어쩔 수 없이 차도로 내려와 걷게 되는 경우도 많다. 그 과정에서 교통사고의 위험에 노출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에 지난 10일 건축공간연구원(원장 이영범, 이하 AURI)에서 ‘2021 제2차 AURI 건축도시포럼’을 개최해 ‘즐겁게 걷고, 함께 쓰는 보행도시’라는 주제로 토의를 나눴다. 이영범 AURI 원장은 개회사를 통해 “‘보행’은 도시 주민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이며, 이를 끊임없이 연구하고 개선시켜서 앞으로의 도시 계획 수립에 반영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정해구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이사장 또한 “도시,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모습은 수많은 시민들이 자동차를 타고 줄지어 도로 위를 지나가는 모습”이라며, “이제까지 도시, 특히 도로 계획은 ‘차량’을 중심으로 세우다보니 효율성은 높을지 몰라도 삭막하고 황량할 뿐만 아니라 보행자들의 보행권을 제대로 보장하지 못했다. 앞으로는 탄소중립의 실현을 위해서라도 보행자가 중심이 되는 공간을 구축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렇다면 보행자의 권리는 어떻게 보장돼야 할까.

박소현 서울대학교 건축학과 교수.
박소현 서울대학교 건축학과 교수.

박소현 서울대학교 건축학과 교수는 ‘걷기 좋은 도시 30년 : 그 많은 운동, 연구, 정책, 사업은 지금 우리를 어디로 이끌고 있나?’라는 발표에서 ▷도시 보행 ▷도시 보존 ▷디자인 정책 ▷고령자 친화 등 4개의 키워드를 통해 지금의 보행도시 관련 정책들을 돌아봤다.

먼저 세종시의 도시개발 현황을 ‘민주주의, 그리고 평등’으로 정의했다. 하나의 중심지로 밀집하는 것이 아닌, 자연 환경을 보존하고 환상(環狀)형 순환체계, 25개 소도시의 동일 위계 집합 등을 통해 대중교통과 보행이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함이 곧 민주주의와 평등이 추구하는 방향과 같다는 논리다.

이와 더불어 지난 1854년 런던 콜레라 사태를 예로 들며 도시계획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도 문제의 원인을 찾아내 끝내 이를 해결한 의사 존 스노우(John Snow)처럼, 보행도시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시민들의 보행량 및 동선 등의 정보를 확보하고 이를 연구해 도로 계획 등에 반영함으로써 시민들이 실질적으로 체감할 수 있는 결과로 이어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김은희 걷고싶은도시만들기시민연대 센터장.
김은희 걷고싶은도시만들기시민연대 센터장.

김은희 걷고싶은도시만들기시민연대 센터장은 자동차 중심의 도시계획에서 벗어나 보행자와 마을을 지켜야 할 때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 센터장은 현재 시행 중인 생활도로・어린이보호구역・거주자우선주차 등의 맹점을 지적했다. 별도의 공간을 두지 않고 도로 위에 그대로 주차공간을 올려놓음으로써 그만큼 길이 좁아지고, 이 때문에 보행에 필요한 공간이 충분치 못하게 됐다는 것이 김 센터장의 설명이다.

또 어린이보호구역을 초등학교 앞 도로로만 한정함으로써 정작 어린이들이 자주 다니는 도로가 보호구역으로 지정받지 못하는 등의 문제점을 거론하며, 도로를 통행하는 어린이들이 보다 실질적으로 보호받을 수 있도록 어린이보호구역의 지정 절차 및 기준을 완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뿐만 아니라 생활도로 등의 시설물을 설치할 때 주변 보행 환경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사례들을 소개하며, 현장 파악 및 보행자들의 의견이 배제된 탁상행정과 무분별하게 설치된 시설물로 인해 초래되는 불편함 등을 지적했다.

이와 더불어 최근 각 지자체에서 추진 중인 도시재생사업 및 주택공급정책에 있어 주변 도로에 대한 보행 정책에도 이를 반영, 보행권 행사에 있어 소외받는 계층이 없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김 센터장은 “자동차와 보행을 분리함으로써 보행자, 특히 어린이들이 안전하게 다닐 수 있는 통로를 확보해야 한다”고 말했다.

오성훈 AURI 선임연구위원.
오성훈 AURI 선임연구위원.

이에 오성훈 AURI 선임연구위원은 ‘도로 다이어트’라는 개념을 소개했다. 차도/보도라는 이분법적 도로 규정에서 벗어나 물리적 해결방안 등에 대한 연구를 거쳐 미처 활용하지 못한 공간을 찾아내 활용하는 한편, 보행자들을 위한 공간을 따로 분리해 보행자들의 통행을 보장하는 제도이다.

오 연구위원은 “보행도시 조성을 위해 차도와 보도의 분리, 주차 공간 확보로 도로 위의 공간을 보행자에게 돌려주고자 노력하고 있으나 아직 부족한 점이 많다”며, “‘도로 다이어트’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 및 계획 수립을 통해 보행자가 안전하게 걸어다닐 수 있는 길을 만들 수 있도록 노력 중”이라고 밝혔다.

이어진 토론회에서는 정석 서울시립대 도시공학과 교수를 좌장으로 ▷한수경 AURI 보행환경연구센터장 ▷한상진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심재익 한국교통연구원 선임연구위원 ▷김정훈 행정안전부 안전개선과장 등 학계 및 정부 관계자들이 모여 머리를 맞댔다.

한수경 센터장은 현재 시민들의 보행량 및 보행형태 등 관련 DB가 부족한 점을 들며 이를 구축할 것을 촉구했다. 시민들의 보행 패턴 등을 빅데이터로 체계화, 이를 활용해 정부 및 지자체의 도로 정비 사업 및 도시 개발 계획에 적극 반영해야 한다는 것이 한 센터장의 의견이다.

또 DB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단순히 주어진 정보를 축적하는 것뿐만 아니라 도시 내 산재해 있는 보행 취약 지역 및 위험요소 등에 대한 정보를 파악함으로써 시민들이 몸소 체감할 수 있는 정책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정석 서울시립대 교수를 좌장으로 열린 토론회에서 민・관 대표들이 모여 의견을 나누고 있다.
정석 서울시립대 교수를 좌장으로 열린 토론회에서 민・관 대표들이 모여 의견을 나누고 있다.

한상진 교수는 과거 및 현재 실시했고, 실시 중인 도시계획에 있어 ‘보행’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편이며, 특히 차도와 보도의 경계가 모호한 점이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한 교수는 “계획 수립 단계에서 보행권 보장에 대한 안건의 우선순위를 높이고, 차도와 보도를 명확하게 구분해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며 정부 및 지자체에게 이를 이행할 것을 주문했다.

또 김은희 센터장의 발표에서 언급된 ‘거주자우선주자’ 제도에 있어서도 주차 공간을 미리 정해놓은 뒤 해당 지역을 지역 주민들이 선착순으로 이용하게 함으로써 사용상의 혼선을 최소화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심재익 한국교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교통사고’에 주목했다.

당장의 성과에 급급해 탁상행정을 늘어놓는 정부와 지자체를 비판하는 한편, 사회 전반에 보행자의 안전을 중시하는 문화가 정착할 수 있도록 장기적인 로드맵을 수립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심 연구위원은 “보행도시 달성을 위해 지금까지 이룬 성과들도 많지만, 여러 방면에서 아직 미흡한 부분이 많은 것도 사실”이라며, “교통사고는 반드시 사람의 ‘실수’에서 벌어진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도시 내 차량의 제한속도 관리와 더불어 운전자 스스로가 보다 경각심을 가지고 운전하는 풍토가 조성돼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김정훈 행정안전부 안전개선과장은 보행자 사고 피해자 중 60%가 만 65세 이상의 고령층이라는 사실을 제시하며 이들에 대한 안전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또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에서 보행자가 횡단하거나 횡단하려고 할 때에도 차량에게 일시정지 의무를 부과하도록 하는 도로교통법 개정안 등을 통해 보행자의 보행권을 우선시 하도록 했으며, 최근 잇따라 발생하고 있는 우회전 사고 사례들을 수집하고 이를 분석해 방지 대책 수립 및 그 법적 근거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광주시민권익위원회에서 광주광역시 시민들의 95.8%가 ‘걷고 싶은 도시’의 필요성에 공감한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광주시민권익위는 이 결과를 토대로 ‘걷고 싶은 도시 광주’의 실행계획을 수립해 광주광역시에 전달하며 이를 적극 추진할 것을 권고했다.

그 밖에도 최근 산책 또는 조깅 중에 길에 버려진 쓰레기를 줍는 ‘플로깅(plogging)’, 걸음 수만큼 마일리지를 적립해 물건을 구입하거나 각종 NGO에 기부하는 등의 캠페인 등도 활발히 열리고 있다.

시민들에게는 자신의 의지로 길을 걸어갈 ‘권리’가 있다. 그 권리를 지키는 것은 보다 행복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정부 및 지자체가 마땅히 수행해야 할 의무이다.

 

한국건설신문 황순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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