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칼럼] 조경의 미래, 조경학의 미래
[조경칼럼] 조경의 미래, 조경학의 미래
  • 김영민 서울시립대학교 교수
  • 승인 2020.05.18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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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립대학교 김영민 교수
서울시립대학교 김영민 교수

업역의 조경과 학문으로서의 조경학. 우리는 조경과 조경학이 같은 미래를 꿈꾸고 있다고 믿어왔다. 그런데 과연 그러한가?

조경학은 실용 학문이다. 조경학은 법적으로 규정된 조경이라는 업역을 전제로 한다. 모든 학문이 그러하지는 않다. 이는 조경학이 순수한 학문적 목적을 추구하기보다는 특정한 실천의 업역을 위한 지식의 체계라는 것을 의미한다. 옴스테드가 조경가라는 타이틀을 처음 쓴 것이 1863년, 조경가들의 협회인 ASLA가 설립된 것이 1899년, 최초의 조경학과가 미국에서 설립된 것이 1900년이니, 조경은 학문보다 업역이 먼저 확립된 분야이다. 최초의 공식 조경가이자, 여전히 최고의 조경가로 추앙받는 옴스테드가 죽을 때가 되어서야 조경학이 출발했으니, 조경의 업,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설계라는 실천은 조경학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조경학은 조경의 업이 필요했던가? 조경이 처음으로 제도화된 미국의 경우 업을 뒷받침하기 위해 학이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겠지만, 한국은 상황은 다르다. 1973년 조경학과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 건축학, 임학, 원예학 등 다양한 조경의 인접 분야의 전문가들이 조경학의 기초를 세웠다. 지금도 조경학은 건축학과 농림학의 접근에 뿌리를 두고 있다. 건축의 토대는 예술적 스튜디오 교육과 사회학적 공간 연구의 방식으로 발전하였고, 임학과 원예의 토대는 자연 과학적 연구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오늘날 수많은 학문의 가치를 동일하게 평가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대부분의 학문은 논문의 수와 인용지수라는 같은 기준으로 평가받는다. 조경학도 예외일 수 없다. 결국, 인용이 많이 되는 국제 학술지에 논문을 많이 실을수록 좋은 연구자이다. 그리고 수준 높은 논문을 쓸 수 있는 대학원생을 많이 길러낸 교수가 좋은 교육자이다. 물론 학과의 입장에서는 수업의 질과 학생들의 취업률도 중요하지만, 학문의 발전과 직접적 연관은 없다. 굳이 학문이 업의 직접 혜택을 받을 일은 없다.

그래서 조경의 업과 학문의 괴리는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며 최근의 문제도 아니다. 업에서는 대학이 실무에서 필요한 능력을 갖춘 학생들을 배출하지 못해 결국 다시 교육을 해야 한다고 불평한다. 실무적 감각도 경험도 없는 학자들이 감투를 쓰고 자문으로 들어와 오히려 업의 발목을 잡는 역할을 한다고 비판한다. 한편 학에서는 업이 타성에 빠져 늘 하던 방식대로 일한다고 생각한다. 빠르게 변화하는 학문과 기술의 발전을 업은 알지도 못하며, 알 의지도 없어 위기를 자초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이럴 바에는 아예 건축처럼 건축학과 건축공학을 나누어 설계의 업과 학문, 공학의 업과 학문을 분리하자는 이야기도 나온다. 그러나 조경의 상황은 건축과 다르다. 전국 대학의 건축 관련 학과 입학생 수는 조경학의 10배이다. 산업의 규모는 그것보다 더 크다. 조경을 다시 쪼개기에는 조경의 업도 학문도 독립적으로 유지되기 되기 어렵다. 그렇다면 업은 업으로, 학은 학으로 별개로 본다면 어떨까? 일본은 이러한 길을 택했다. 한때 우리 선배들의 책꽂이를 차지하고 있던 일본의 조경 사례들은 잊힌 지 오래고, 일본에는 조원학과를 유지하는 대학은 거의 없다. 조경학은 원예, 산림, 건축, 도시, 디자인의 일부로 흡수되어 버렸다. 혹자는 이를 저성장 시대의 대안이라고, 학문적 다양성을 존중하는 모델이라고 하지만, 실상은 조경의 소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다른 대안으로 어떤 이들은 미국처럼 업이 중심이 되는 학문의 모델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한국의 상황에서 이미 그런 모델은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하버드 GSD로 대표되는 미국식 모델을 그대로 수입한 서울대 환경대학원은 이미 GSD와 전혀 다른 길을 가고 있다. 업과 학문의 관계와 구조, 그리고 규모가 아예 다른 미국식 모델은 한국에서 성공하기 어렵다.

한국에서 조경의 업과 학은 불편한 공존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 실상 생각하는 미래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어느 하나의 미래를 강권할 수도, 분리할 수도 없다면 우리에게 남은 대안은 무엇인가? 나는 유일한 대안은 서로 다른 미래 사이에 공유지대를 만드는데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조경의 업은 설계안이 가져올 수많은 효과를 역설하면서 이를 증명할 시도를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정말 좋은 설계안은 생태적 다양성을 높이고, 열섬효과를 줄이며, 아이들이 더 좋아하는 공간을 만드는가? 반면, 학문은 현상을 검증하고 정교하게 예측하려 했지, 창작의 영역이 가져오는 효과를 연구의 대상으로 간주한 적은 거의 없다. 그러나 현상에 대한 시뮬레이션이 가능하다면 가상의 대안에 대한 시뮬레이션도 가능하다. 우리는 조경은 예술이며 과학이라고 배워왔다. 이는 예술로서의 조경, 과학으로서의 조경, 두 개의 분리된 조경이 있는 것이 아니라, 조경은 예술이면서 동시에 과학이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예술이 과학을 추구해야 하고 과학이 예술을 추구해야 한다는 말과는 다르다. 예술은 예술의 길을, 과학은 과학의 길을 걸어도 된다. 다만, 과학이 개입할 예술의 측면을, 예술을 파악할 수 있는 과학의 방식을 함께 고민해야 한다.

나는 대학원에서 미국 경관 생태학의 아버지라 칭송받는 리차드 포먼 교수의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 나는 수업 시간에 그에게 물었었다. 왜 당신은 더 많은 연구 업적을 낼 수 있는 학교를 떠나 연구진도 구할 수 없는 디자인 대학원에 왔냐고. 그는 자신이 생태학을 연구했던 이유는 생태학을 통해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였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연구를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조경가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고.

조경의 업과 학은 더 나은 세상을 위한 미래를 준비할 공유지대를 함께 만들어야 한다.

 

정리 = 한국건설신문 선태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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