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칼럼] 놀이에 대해 생각하다
[조경칼럼] 놀이에 대해 생각하다
  • 김아연 서울시립대학교 교수
  • 승인 2017.08.23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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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놀 권리, 게으를 권리, 일하지 않을 권리를 허하라

▲ 김아연 서울시립대학교 교수

나의 삶에서 일과 놀이, 휴식과 공부의 경계가 사라진 지 오래다. 퇴근 후에도, 주말에도, 휴가지에서도 카톡과 이메일로 끊임없이 전달되는 각종 업무 내용과 밀린 일들을 처리하느라 급급한 내 모습은 일에 종속된 도구적이며 수동적인 인간일 뿐이다.
주변을 돌아봐도 비슷하다. 하루에 미팅 서너 개를 뛰고, 저녁 시간 이후에야 비로소 책상에 앉아 밀린 일들을 하게 된다는 설계사무소 소장들과 교수들의 삶을 직간접적으로 듣다보면, 결국 우리는 노동을 통해 존재 가치를 인정받고자 했던 “근대적 인간”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근대적 인간을 대표하는 개념으로 호모 파베르(Homo Faber)를 들 수 있는데, 파베르는 도구를 사용한다는 의미이다. 18세기 기술 혁명과 공장제 노동은 청교도적 직업윤리와 결탁하여 쾌락을 금기시하며 놀이와 유희를 폄하하는 시대정신을 확산시켜왔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네덜란드의 학자 하위징아가 탐구했던 놀이하는 인간으로서의 호모 루덴스(Homo Ludens)라는 개념은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 놀이와 문화가 갖는 창의적인 힘에 주목한다.
노동과 대비되는 놀이는 목적성보다는 무목적성을, 유용성보다는 쓸모없음을, 필연보다는 우연성을, 의무보다는 자유를, 결과보다는 과정지향성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다. 다시 우리 주변을 살펴보자. 공원을 만드는 사람들이 정작 바빠서 일반 시민들보다 더 자주 공원에 가지 않는다. 우리들이 하는 일의 궁극적인 지향점은 무엇일까?
물리적으로는 사람들이 꿈꾸는 자연과 문화가 만드는 특정한 경관의 구조와 조형을 만드는 것일 테고, 내용적으로는 사람들의 휴식과 놀이를 디자인하는 것이 아닌가. 놀이를 디자인하는 사람들이 잘 놀지 못하며, 놀이에 대해 공부하지 않고 놀이에 대해 성찰하지 않는다.
조경의 문제는 여기에 있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것을 제대로 만들 수 있을까? 내가 고민하지 못한 것을 제대로 구현할 수 있을까? 결국 이렇게 형식적으로 만들어진 공간들은 재미없으며 감동을 주지 못한다.
최근 행정중심복합도시인 세종시에 새로 만들어진 공원들을 답사하며 도대체 40년이 넘도록 축적된 우리나라 조경의 수준이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가에 대해 가슴을 치며 안타까워했다. 놀이와 여가와 휴식과 쉼에 대해 철저하게 사유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해외의 예쁘고 쿨한 놀이터 사례를 흉내 내기보다는 우리나라 어린이들과 어른들이 처한 현실과 그들의 욕구에 대한 고민이 더 필요해 보인다.

■ 시간을 지배하는 자가 공간을 지배한다

4차 산업혁명에 대한 얘기들이 대중적 담론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부정적으로 보자면 실업률이 올라갈 것이고 기계와 IT에 소외된 사람들이 늘어갈 것이며, 첨단 과학 기술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사회적 병리현상 역시 만연할 테지만, 반대로 사람들에게 주어진 시간(수명 연장을 포함해서) 중, 일하지 않는 시간의 비중이 더 커지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혜택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늘어난 일하지 않는 시간에 과연 사람들은 무엇을 어디서 하게 될까?
근대적 도시에 있어서 도시의 노동자들은 끔찍한 노동 현장과 주거 상황이라는 현실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자연으로서의 공원을 원했으며, 그들은 일터를 벗어나 바로 공원으로 향했다.
그렇다면 현대 혹은 미래의 도시에 있어서도 일터를 떠난 사람들이 바로 공원으로 향할까? 누구도 자신 있게 그렇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미 아파트는 그들만의 공원을 가지고 있다. 최근의 아파트 단지에 가본 사람이라면 주차 전쟁을 치르면서 다른 공원에 갈 필요성을 못 느낄 것이다. 기후변화로 인해 길고 매서워진 여름과 겨울의 날씨에는 쇼핑몰이나 영화관(심지어는 실내형 테마파크)같은 쾌적한 실내 공간을 선호한다.
젊은이들은 호텔놀이, 카페놀이, 시체놀이 등 도심에서의 스테이케이션(staycation)을 선호한다. 청소년들은 공부하지 않는 시간에는 컴퓨터 게임에 몰두한다. 잠시 포켓몬고가 젊은이들을 공원으로 오게 할 수 있는 좋은 방안이라고 여기기도 했으나, 그건 너무 순진한 발상이었다.

■ 저녁이 있는 삶을 공원으로 이끌 수 있을까?

여가 시간을 지배하는 산업, 놀이를 지배하는 산업이 미래 공간 산업에 있어서 매우 중요해질 것이다.
결국 공원을 포함하여 외부공간을 다루는 우리들의 미래의 적은 건축가나 도시, 토목 전문가가 아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경쟁자들은 게임회사, 쇼핑몰, 호텔과 스파, 영화관과 각종 실내 놀이방, 건강과 스포츠 관련 회사, 스마트폰 앱 개발자 등이 될 것이다.
어린이에게도 어른에게도 놀이가 필요하다. 놀이는 노동과 공부, 목적이 있는 삶으로부터 벗어나 온전히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창의적인 재충전의 활동이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는 퇴근하는 사람들의 저녁이 있는 삶을 공원으로 이끌 수 있을까?
버트랜드 러셀이 《게으름에 대한 찬양》에서 강조했듯이, 노동하지 않는 시간에 대한 죄의식으로부터 벗어나 게으름이 주는 사색과 지적 유희, 자유와 온전한 인간으로서의 주체성과 총체성을 회복할 권리를 찾아야 한다.
우리 모두에게 놀 권리를 허하라. 그리고 전문가로서의 우리는 놀이와 놀 장소에 대해 진지하게 그러나 유희적으로 사유하자.
결국 미래에는 시간을 지배하는 자, 특히 놀이 시간을 지배하는 자가 공간을 지배할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을 우리는 놀이로서 접근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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