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설인문학24> ‘도시 공간의 다양성’을 인정해야 젠트리피케이션이 사라진다
<건설인문학24> ‘도시 공간의 다양성’을 인정해야 젠트리피케이션이 사라진다
  • 이오주은 기자
  • 승인 2017.03.08 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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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방 런던정치경제대학교 지리환경학과 교수

희망의 도시,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_(1)투기적 도시화, 젠트리피케이션, 그리고 도시권

 

‘도시 공간의 다양성’을 인정해야
젠트리피케이션이 사라진다
 


< 부동산 투기… 젠트리피케이션의 민낯 >

┕ 상대적으로 소득이 낮은 지역은 뒤쳐졌거나 낙후된 것인가?
┕ 지대가 낮은 공간을 점유한 사용자는 영원한 축출의 대상인가?
┕ 도시에 소유주의 권리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용자의 권리도 있다.


4. 도시권: 누구를 위한 권리인가?

▲ 신현방 런던정치경제대학교 지리환경학과 교수.

<지난호에 이어> 국내 자산의 89%가 부동산 자산(2013년 기준)이라는 사실은 큰 위험을 동반한다. 이러한 위험은 국가뿐만 아니라 자본도 직면하는 문제이고, 나아가 투기적 이윤을 추구하는 일반가정 역시 직면하는 문제이다.

이 과정에서 부동산에 보유자산의 상당부분을 쏟아 붓는 중산층의 경우 국가 및 자본의 이해관계에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합치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는 중산층을 진보적 사회변혁의 주체로 상정하는 기존 인식이 한계가 있음을 나타낸다.

그렇다면, 투기적 도시화, 젠트리피케이션의 확산 하에서 이에 대한 저항의 도구는 무엇일까? 유용한 이론틀과 실천수단으로서 [도시권]을 생각해본다.

[도시권] 쟁취를 적극 주장한 데이비드 하비는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도시를 “소수에 의한 다수의 착취가 이루어지는 공간”으로 이해하며(Harvey, 1976/ 2009, 314), 이러한 착취구조를 타개하기 위해선 도시에 대한 피지배계급의 권리회복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앙리 르페브르와 데이비드 하비 모두에게 [도시권]의 쟁취란 단지 개별적인 권리의 쟁취만이 아니다. ‘공간생산 과정을 전반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힘’이 국가나 자본이 아닌 도시민에게 있어야 한다(Harvey, 2012; Lefebvre, 1996).

그러나 [도시권]은 종종 공허한 구호로 치부되기도 한다. 거시적 주장만 있을뿐 구체적인 실천 프로그램이 부재하며, [도시권] 쟁취를 위한 전략적 지침 또한 부재하다는 점 등이 지적되기도 한다.

피터 마르쿠제1)는 이를 보완하고자, 도시권은 ‘물질적 결핍을 경험하고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한 이들의 당면한 요구’이자 ‘미래에 대한 욕망’이라 정의한다(Marcuse, 2009, 190).
마르쿠제는 나아가 [도시권]에 대한 사회 제세력의 관계를 설명하는데, 이를 위해 ‘물질적 이해관계’와 ‘문화적 이해관계’로 구분한다.

‘물질적 이해관계’에 따른 분류는 대략 계급적 구분을 따른다 할 수 있다. ▷고위직에 선출되었거나 이를 열망하는 정치인, ▷체제 수호에 복무하는 지식인 그룹(미디어 종사자, 학자 및 예술가 등 포함), ▷자본가(대기업 소유주나 경영진), ▷젠트리(여기에는 상대적으로 더 성공적인 중소기업 경영진이나 전문가 그룹 등을 포함), ▷개인사업자 등은 결핍층에 비해 이미 [도시권]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결핍층에는 착취를 겪는 기존 노동계급뿐 아니라 기존 노동계급운동의 성과로 획득한 다양한 장치에 따른 보호를 받지 못하는 이들을 포함하는데, 이들이야 말로 도시에 대한 권리가 시급하다고 마르쿠제는 주장한다.

예를 들어 ▷법적으로 노조 결성 권리가 보장되지 않은 소규모 사업장에서 근무하는 노동자, ▷동일 노동을 하면서도 차별을 받는 파견직 노동자, 특히 ▷남성 중심의 노동운동에서 소외되고 권리의 침해를 받기도 했던 여성노동자 등이 후자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문화적 기준’에 따른 분류의 경우, 체제 수호에 복무하는 다양한 이데올로기 및 신념체계의 생산에 복무하는 이들이나 권력 비호에 힘쓰는 지식인 그룹 등은 이미 도시에 대한 권리를 충분히 행사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도시권] 보장이 가장 시급한 그룹은 소외계층(청소년·예술가·체제에 저항하는 다양한 지식인 그룹 등)과, 인종ㆍ민족ㆍ성ㆍ생활양식 등에 의거하여 억압받는 이들이라고 할 수 있다.
마르쿠제는 궁극적으로 체제 저항과 대안적 운동을 위해서는 어떤 세력들이 연합전선을 형성해야 하는지를 묻는다.

조직된 노동운동에 의거한 체제저항운동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한계가 있다. 때문에 현 자본주의 시스템 하에서 결핍을 경험하고 억압을 겪는 다양한 그룹이 자본주의 극복을 꾀하고, 이를 위해 [도시권]을 공통의 목적으로 상정하여 거대한 사회적 블록을 형성하는 것을 고민한다(Marcuse, 2009, 192).
한편, 마르쿠제의 이와 같은 시도를 “한국 상황에 맞춘 반(反)젠트리피케이션 운동에 적용해보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표 참조>

▲ [표] 반(反)젠트리피케이션과 도시권: 누구와 연대 가능한가? = 상가세입자나 주거세입자의 운동으로 그치기보다는 보다 폭넓은 연대의 블록을 형성하는 것이 필요하다.

물질적 분류는 부동산 축적 체제하에서 부동산 소유에 따른 불로소득의 향유 정도에 따라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대규모 부동산 자산을 보유하고 운용하고 있는 ▷대기업, 지주, 대량 주택소유주, ▷상대적으로 소규모의 부동산 자산을 운용하면서 불로소득의 임대수익을 올리는 지주 그룹, ▷부동산 투자를 통한 자산증식에 매진하고 결과적으로 불평등 구조의 재생산에 복무하는 부동산중개업자 및 연예인 그룹, ▷현 부동산 축적체제의 재생산에 매진하는 정치세력, ▷전문가 자문그룹 및 고위 행정직 등은 이미 도시에 대한 권리를 갖고 젠트리피케이션에 따른 부동산 불로소득의 이익을 공유한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자가소유주, 특히 복수의 주택을 보유함으로써 추가 임대수익을 올리는 주택소유주가 아닌 자가소유주, ▷상가세입자, ▷민간주택 세입자, ▷공공임대 세입자, ▷쪽방 거주자ㆍ노숙인ㆍ청년 등의 주거빈곤층은 모두 젠트리피케이션과 부동산 축적구조의 가장 큰 피해자이며 도시에 대한 권리를 누리지 못한다 할 수 있다.

또한, 문화적 측면에 따른 분류를 시도하면, 부동산 축적 구조를 재생산하고 유지하기 위한 각종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는데 기여하는 전문가 그룹과 지식인, 그리고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한 저항(예를 들어 명도소송에 저항하는 상가세입자 등)을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욕심의 발현으로 표현하는 각종 미디어 등은, 이미 젠트리피케이션의 혜택을 보고 있으며 도시권을 향유한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하여 젠트리피케이션에 의해 예술활동 공간에서 쫓겨나는 예술가, 문화운동가, 노동을 제공하고 공간 생산에 기여하면서도 자신들의 목소리를 인정받는데 어려움을 겪는 이주노동자, 대안적 도시공간 창출을 고민하며 어려운 환경에서 다양한 실험을 수행하는 도시운동가 등은 역시 젠트리피케이션의 피해자이며, 도시에 대한 권리를 인정받아야 할 그룹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분류는 젠트리피케이션 극복을 고민하고 현재의 부동산 축적체제의 극복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저항운동의 연대 대상이 누구일지를 알려준다.
또한, 반(反)젠트리피케이션 운동이 단지 상가세입자나 주거세입자의 운동으로 그치기보다는 보다 폭넓은 연대의 블록을 형성하는 것이 필요함을 보여준다.

한국 사회에서는 젠트리피케이션의 광풍 아래 일반 자가거주자, 세입자, 영세민, 주거빈곤자, 청년, 예술가, 활동가, 이주노동자 가족 등은 모두 하나의 운명공동체이며, 연대의 대상인 것이다.

1980년대와 90년대 한국 철거재개발의 폐해를 살폈던 연구는 종종, 철거의 이주대상이었던 영세가옥주와 자가세입자만을 (이윤추구를 위한 공간 재생산의) 주요 피해자로 인식했으며, 상가세입자 등과 같은 토지이용자들은 주 연구대상에서 제외되곤 하였다.

물론 당시 재개발에 대항한 ‘임대아파트 쟁취 투쟁’ 등을 통해 일부 세입자의 재정착 가능성이 증대하였고, 주택 공공성에 대한 인식이 다소나마 증진되기도 했다. 하지만 기존 부동산 축적체제가 그대로 유지되고 지주의 이해가 지속적으로 관철되어 왔다는 점에서 젠틔리피케이션을 막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5. 결론: 공간과 삶의 다양성

얼마 전 타계한 지리학자 도린 매시2)는 “공간적 다양성이 시간적 차이로 곧잘 여겨진다”고 비판한다(Massey 1999, 280).
지역간 소득 격차를 예로 든다면, 소득이 상대적으로 낮은 지역은 종종 시간적으로 발전이 뒤쳐진 곳으로 간주되곤 한다. 이 경우, 낮은 소득 지역은 저개발 지역으로 서열매김을 당하며, 열등한 곳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이에 비해, 공간적 다양성에 기반한 인식은 공간적 차이를 시간적 차이가 아닌 서술의 다양성으로, 존재방식의 다양성으로 이해한다(Massey, 1999, 280-281).

도린 매시의 이러한 비판은 젠트리피케이션을 바라보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전해준다.
정책입안자나 정치인, 기업인뿐 아니라 일반인들도 도시에서 발견되는 다양한 공간을 바라보면서 우열을 매기고 낙인찍기를 한다. 과거 달동네, 판자촌은 단독주택단지나 아파트 지구에 비해서 낙후된 곳으로 인식하여 철거 개발의 대상으로 여겨졌다. 이는 도린 매시의 지적과 같이 주거지역의 다양성이 다양성 그 자체로 인정받지 못하고 공간의 서열 매기기로 낙인이 찍힌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닐 스미스의 관점에서 얘기하자면 지대(地代) 차이가 곧 공간의 우열로 간주된다. 낮은 지대의 공간은 높은 지대의 공간에 비해 열악하고 낙후되었으며, 개발을 통해 보다 높은 수준의 공간 즉, 중산층과 부유층의 공간으로 재편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낮은 지대의 공간을 점유한 사용자는 끊임없이 높은 지대의 공간 사용자와 비교되고, 축출의 대상이 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말 그대로 공간 이용의 다양성이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이 젠트리피케이션의 모습인 것이다.

따라서 젠트리피케이션을 막고 투기적 도시화 과정을 극복하고, 소유자뿐만 아니라 사용자의 도시권리가 인정받기 위해서는 우선 “도시 공간의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

저소득층이 축출의 대상으로 여겨지지 않고 공존의 권리를 인정받는 것, 상가세입자가 건물주의 횡포로 쫓겨나기 보다는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고 공간 사용가치의 창출에 기여하는 주체로 인정받는 것, 도시민이 말 그대로 ‘작고 오래된 단골집을 가질 권리를 갖는 것’ 등은 모두 이러한 ‘다양성의 인정’에서 출발한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아울러, 이러한 인식에 기초하여 제도적 측면에서 어떻게 하면 이러한 다양성을 보장할 수 있는지 고민하는 것이 소극적 의미의 반(反)젠트리피케이션 운동이라 한다면, 투기적 도시화의 근간을 이루는 부동산 소유를 통한 불로소득이 창출되는 자본주의의 축적구조 자체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고민하는 것은 보다 적극적인 의미의 반(反)젠트리피케이션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정리= 한국건설신문 이오주은 기자

 

■각주
1) 피터 마르쿠제(Peter Marcuse, 1928~ )는 변호사이며 헤르베르트 마르쿠제의 아들이다. 헤르베르트 마르쿠제(Herbert Marcuse, 1898~1979) 또는 허버트 마르쿠제는 독일에서 태어난 미국 사회철학자이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사회주의 사회학자로 분류된다.

2) 도린 매시(Doreen Barbara Massey, 1944 ~2016)는 맨체스터 출신으로서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지리학을 전공하고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지역과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1970년대 이후 인문지리학과 사회과학 등 학계와 정치적 장으로 ‘공간과 공간관계의 복잡성’이라는 지리적 화두를 끌어들이는 데 기여했다. 국내에 소개된 저술로서 『공간, 장소, 젠더 (정현주 역, 2015)』와 『공간을 위하여 (박경환 역, 2016)』가 있다. -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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