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건축의 좌표를 세계지도에 새기는 일
한국건축의 좌표를 세계지도에 새기는 일
  • 이오주은 기자
  • 승인 2017.03.03 13: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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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츠커 가라사대… “그 건축이 인류에게 얼마나 유의미한 기여를 하고 있는가”

yoje@conslove.co.kr
프리츠커상은 미국 시카고의 프리츠커(Pritzker) 가문이 소유한 하얏트 재단이 1979년 제정했다.

매년 ‘인류와 건축 환경에 지속적이고 일관되게 의미 있는 공헌을 해 온 생존 건축가’에게 수여하는 상이다.

인종ㆍ종교ㆍ이데올로기 등 차별과 차이의 관점에서 자유롭고자 하며, 건축적 사고의 혁신성과 깊이를 기준으로 삼고자 한다. 기술 기여도도 심사기준이다.

지난 40년동안 이 기준들이 얼마나 잘 지켜져 왔는지는 달리 생각해 볼 문제지만, 분명한 것은 세계 건축계에서 가장 권위있는 상이라는 것이다.

프리츠커상은 1979년 미국 건축가 필립 존스를 필두로 지난해까지 공동수상자 포함 40명의 수상자를 선정했다.

2004년 자하 하디드(Zaha Hadid. 1950~2016, 이라크 출신 영국 건축가)는 최초의 여성 수상자로 이름을 올렸고, 2015년 수상자 프라이 오토(Frei Otto, 1925~ 2015, 독일)는 생전에 수상 소식을 들었지만 시상식 전에 향년 90세로 세상을 떠나게 되어 최초의 사후 수상자가 됐다.

지난해 2016년 칠레 건축가 알레한드로 아라베나(Alejandro Aravena, 1967)의 수상도 올해와 같은 이변이었다. 최연소 단독수상자 중 한 명이라는 점도 화제였고 강대국이 아닌 칠레에서 배출한(남미 건축가로는 4번째) 수상자라는 점도 화제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파격은, 화려하거나 기술적이거나 기념비적인 건축이 아니며,  작가주의 건축가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따라서 전 세계 건축계는 ‘사회참여 건축ㆍ공동체 건축’을 실천해 온 이 젊은 개척자의 손을 들어 준 프리츠커 심사위원회에 더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이번 프리츠커상 수상자는 누구인가, 어떤 가치를 말할 것인가”에 주목하도록 만든 것은 지난해부터인듯 싶다. 올해도 프리츠커 위원회는 앞으로 건축이 가야할 길을 ‘수상자’로서 말했다.

지금까지의 프리츠커상이 건축의 외연적 경향을 보여주고 유명한 작가의 업적을 기렸다면(예외도 있었지만), 앞으로는 건축의 어젠다, 개척할 길, 가치를 제시할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예측해 본다. 베니스 국제건축비엔날레의 변화와 맥락을 같이 하여.

그리고 우리는, 매년 프리츠커 수상자가 발표될 때마다 “한국인은 아직까지 한 명도 없다”를 상기한다.

일본은 1987년 단게 겐조(1913~2005)부터 1993년 마키 후미히코(1928), 1995년 안도 다다오(1941), 2010년 세지마 가즈요(1956)/니시자와 류에(1966)의 공동수상, 2013년 이토 도요(1941), 2014년 반 시게루(1957)에 이르기까지 7명이 수상했으며, 중국은 2012년 왕슈(1963)의 선정으로 최초의 프리츠커 수상자를 배출했다.

게다가 2012년부터 2014년까지 3년 연속 일본과 중국, 동아시아 건축가에게 돌아갔다. 한국만 비켜서.

프리츠커 수상의 의미가 단순히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불리기 때문만은 아니다.

메달 획득이나 명예보다 근본적인 이유, 수상을 염원하는 속뜻은 이 상이 제정된 의미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 건축이 우리 인류에게 얼마나 유의미한 기여를 지속적으로 해 왔는가”라는 질문, 그 질문에 우리는 왜 화답하지 못하는가에 대한 성찰이다.

2012년 왕슈의 수상은 한국 건축계에 특히 충격이었다. 사회주의로 오랜시간 닫혀 있던 후발주자 중국이, 개발국가다운 양적 성장이 아니라 질적 가치에서 이러한 족적을 그토록 단시간에 남겼다는 데 대한 충격이었다. 

그러나 당시 역시 최연소였고 알려진 바 없는 왕슈의 수상은 그 작업보다 존재 자체로 이슈였고, 이는 신흥국 중국의 성장을 선진국들이 주목하고 있음을 시사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럼에도 한중일 3국 중 다른 분야에서는 앞서면 앞섰지 뒤쳐지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한국인들이기에, “건축계만큼은 왜” 라는 자문을 하게 했다. 프리츠커 발표 때마다 연례행사처럼 해 온 자성이지만 중국이 수상하던 해에는 어느 때보다 목소리가 컸다.

우연인지 계기인지, 일본 2연패와 중국 수상과 시기를 맞물려 한국도 프리츠커 수상자를 배출하기 위한 본격적인 노력을 민관 합동으로 다방면에서 기울이고 있으니, 머지 않아 우리도 “인류에게 유의미한 기여를 하는 한국적 건축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하고 세상에 기치를 내걸 것이라고 기대해 본다.

사실, 한국 건축의 역량이나 건축물의 완성도를 세계 건축과 단순비교하여 우위를 말하기는 어려운 지도 모른다. 인간을 존중하고 삶의 질을 고려하는 도시인가 아닌가, 그 전반의 컨디션을 논할 때는 우열이 있어도, 건축가 각각의 작업은 다른 측면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프리츠커상의 경향이 엘리트의 관점에서 서서히 내려오는 듯 보이는 것은 어쩌면, 더 이상 기념비적인 건축물과 선봉에서 업적을 쌓은 건축가를 기리기 어려운 여러가지 상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다시 말하면, 개별 건축작업에서 각 상황에 가장 적절한 최선의 디자인을 함에 있어, 흔들리지 않는 가치지향의 선상에 있으려는 꾸준한 노력에 있어, 패권의 여부 또는 선진국/개발국, 서양/동양, 주류/비주류, 중심/변방과 같은 기준이 그닥 효용적이지 않으며, 이처럼 급변하는 세상에 업적 또는 화제성만큼이나 필요한 것은, 긍정적인 실험과 대담한 도전이라고 말이다. 프론티어에서는 평등하게 마련이기에.

하지만 그럼에도 분명히 우리 건축인들에게 과제가 있는 것 같다. 개별 건축가 하나하나의 역량보다도 그들이 공동체가 될 때, 그들이 문화를 형성할 때, 한국건축으로 묶일 때…. 그 순간에 어떤 빛깔을 내고 무엇으로 규정되는가는 오래된 과제가 아닐까. 

한국 건축의 좌표를 세계의 건축지도에 새기는 길은, 우리 건축의 수준이 부족하니 역량을 육성하고 발굴한다는 접근보다는 세계의 언어와 통하는 데 있는 것 같다. 통하는 것은 번역기가 해주지 않는다. 아마도 그 전에 물어보아야 할 것 같다. 자신이 말하는 가치를 “정말 일관되게 이어가고 실천하고 있는가”라고.


한국건설신문 취재부 차장 = 이오주은 수석기자 yoje@conslov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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