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 故이종호, 타계 3주기 출판기념회 열려
건축가 故이종호, 타계 3주기 출판기념회 열려
  • 이오주은 기자
  • 승인 2017.02.17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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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어김없이 밥 한 끼 사주는구려” - (수정2)

 

한국건설신문 이오주은 기자 = 간향미디어랩과 (주)건축사사무소 메타는 17일 오후6시 정동 이화여고100주년기념관 1층 까페에서 <시티 몽타주> 출판기념회와 함께 이종호 타계 3주기 행사를 가졌다.

<시티 몽타주>(2017.02.16)는 간향미디어랩이 건축가 故이종호 교수의 3주기를 맞아 ‘바른손센터와 이화정동빌딩을 통해 본 이종호의 건축이야기’를 엮은 책으로, 건축비평가 송종열, 건축사진작가 김재경, 메타건축 우의정 대표 그리고 건축평론가 전진삼 와이드AR 발행인이 함께 지었다.

이날 추모사에서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김봉렬 교수는 “항상 내게 밥을 사주던 사람, 오늘도 밥을 사주었다”며 고인을 향한 기억을 일깨웠다. 행사에 앞서 꽤 맛난 음식들이 대접된 후 식을 시작한 터였기 때문이다.

밥은 이따금 모든 것을 함의한다. 밥을 같이 먹는다는 행위에 담긴 의미, 밥을 차려주는 것의 의미, 식사를 대접하는 것의 의미를 우리는 알고 있다.

또, 다른 의미에서 김수환 추기경이 남긴 격언 "밥이 되라"는, 제대로 사는 그 어려운 법(진리)을 가장 단순하게,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도록 '밥'에 함축시킨 말이기도 하다.

김봉렬 총장은 밥의 상징에 이어 “전통적으로 3년상이라...이제는 보낼 때가 되었지만...”이라는 말을 반복했다.

보내기 아쉬운 이유들, 본인보다 타인을 먼저 생각한 이종호의 인간적인 면모부터 건축가로서 그의 가치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기억과 추억에 비추어 소소한 듯 친밀하게 그러나 깊이 있게 이야기했다.

떠난 지 어느덧 3년, 하지만 이종호를 그리는 이들의 발걸음은 현재진행형이었다.

보이지도 들리지도 만질수도 없고 물리적으로 육신은 먼지가 된 지 오래라 해도 여전히 살아있을 수 있는 일생이란, 그것도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타인들 안에 지금도 살아 숨쉴수 있는 삶을 산다는 것. 이종호라는 이름 석 자만으로, 무엇인가를 지향하는 건축인들을 한 자리에 모을 수 있는 힘.

아직 살아있는, 한시적인 목숨이란 점에서는 모두가 평등한 이 날 이 자리의 건축인들은, 그=이종호를 통해 지금까지 자신들이 품어온 이상이 시대착오적일뿐인 그저 뜬구름이 아니라, 여전히 가치 있는 노력이라는 사실을 확인받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이 자리의 분위기가 숙연함보다 훈훈함이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고인의 아픔을 되새김하는 자리이기보다는 산 자의 꿈이 그를 통해 다시 한 번 갱신하고 서로에게 수렴된다는 의미로 비춰졌다.

▲ 건축가 故이종호 교수(사진출처= 시티 몽타주).
집단지성 위키백과는 그를 이렇게 정의한다. “이종호(李鍾昊, 1957년 11월 11일 ~ 2014년 2월 21일)는 대한민국의 건축가”다.

이어 “박수근 미술관, 노근리 기념관, 이화여고 100주년 기념관 등을 설계했다. 해외 유학을 거치지 않은 순수 국내파 건축가로써 1976년 신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80년에 한양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한 후, 김수근의 건축사무소 ‘공간연구소’에 들어가 김수근의 마지막 제자로써 10여년 간 크고 작은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설계실장을 역임했다.

1989년에는 독립해 대학로 인근에 '스튜디오 메타'를 설립했다. 1993년 강원도 율전교회를 설계했으며 1994년 양남철과 함께 설계한 '바른손 사옥'이 제6회 김수근 문화상을 수상하면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2005년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건축과 교수로 부임, 학교 도시건축연구소 소장을 맡았다. 그는 '사회적 장소'에 대한 이념을 중요하게 생각해, 건축이 들어서게 될 장소의 역사성과 사회성에 주목하는 작업을 하기를 희망했다“라고 적고 있다 .

그리고 “2013년 11월 29일, 감사원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측에 ‘연구비 부당 집행’을 근거로 이종호 교수에 대한 징계처분을 요구, 학교 측에서 이 교수를 대신해 반발하고 회계오류라고 밝혔음에도 불구, 감사원과 검찰이 횡령 등 부당편취로 해석하기를 밀어붙여, 2014년 2월 19일 구속 영장을 청구하기에 이르렀고, 일부 언론이 곧바로 검찰의 영장 신청 내용을 인용해 이종호 교수가 10억원 대의 횡령과 비리를 자행했다고 보도함으로써, 진실 규명과 결백을 주장하는 이종호 교수로 하여금 투신자살하게 했다. 그 날은 감사원의 재심의 결과를 받지도 못한 상태에서 법원의 영장실질심사가 예정된 2014년 2월 21일의 하루 전이었고, 고인의 시신은 여수 앞바다에서 몸을 던진 지 23일만인 3월 15일 일본 쓰시마섬 해안가에서 발견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2014년 2월 28일 한예종은 석관동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극장에서 비록 고인의 시신은 발견하지 못한 상태였지만 유족과 제자들, 범 건축인과 예술인들과 함께 추모식을 거행했다. 그날의 긴 행렬은 아직도 건축인들이 가슴 속에서 이어지고 있다.

거창하게는 사회적 건축을 추구했다 하지만 사실 그는 일상이란 삶 속에서 상식을 중요하게 생각한 평범한 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상식이라 함은 ‘사람’, ‘도리’, ‘실천하는 정의’와 같은 것들이 포함될 것이다.  

이것들이 그토록 지키고 실천하기 어려운 오늘이라서 어쩌면 이렇게, 건축가 故이종호는 계승되는 정신으로써 앞으로도 오래오래 살아 숨 쉴 것 같다.

▲ 우의정 메타건축 대표.
 
▲ 김봉렬 한예종 총장의 추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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