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설인문학⑳> 젠트리피케이션ㆍ미디어타이제이션ㆍ투어리피케이션
<건설인문학⑳> 젠트리피케이션ㆍ미디어타이제이션ㆍ투어리피케이션
  • 이오주은 기자
  • 승인 2017.01.25 13: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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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조정환 정치철학자 (다중지성의정원 대표)

희망의 도시, 어떻게 이론화할 것인가_(2)예술인간의 탄생과 반자본주의적 공통도시의 전망
 

“도시재생은 축적의 수단이 되는 순간에도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사랑받고 싶어한다
 

 

 


< 신자유주의 스펙터클 도시의 작동 메커니즘 >

 ┕ 예술가, 기술자, 지식인 앞세워 지대 상승 
 ┕ 상승한 지대 지불능력 없는 예술인간은 '공통장'서 추방
 ┕ 미디어스케이프가 배제한 현실은 폴리스케이프에서도 배제


▲ 조정환, 정치철학자
(다중지성의 정원 대표)
<지난호에 이어>  하지만 스펙터클 장치들이 '무지'와 '둔감'과 '단절'과 '냉소'의 효과를 낳는다고 해서, 인지화된 노동자들이 직접적으로 그러한 것을 생산했음을 의미하지는 않으며, 또 그러한 것을 생산하는 존재임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한편에서 인지화된 노동자들은 집단지성의 방식으로 지식을 생산하고 소통도 생산하지만, 그것들(생산물=지식과 소통)을 무지와 불통의 요소로 전화시키는 것은 그것들이 놓이는 스펙터클적 상황과 편집이다.

다른 한편에서 인지화된 노동자들은 스펙터클이 요구하는 인지적 능력만을 발휘하도록 억압당하기 때문에 비스펙터클적 지식과 수평적인 소통, 그리고 스펙터클을 벗어날 수 있는 대안을 생산하는 길에서 제약을 받는다.

스펙터클 도시는 사람들을 압도적인 힘으로 통합시킴으로써 효과를 발휘한다. 스펙터클이 사람을 통합할 수 있는 힘은 스펙터클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인간의 공통본질(Gemeinwesen, 게마인베젠)을 구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메트로폴리스에서 인간의 공통본질은 어떻게 스펙터클로 전화하는 것일까? ‘메트로폴리스의 스펙터클’화에서 우리는 세 가지 과정에 주목할 수 있다.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미디어타이제이션(mediatization), ▷투어리피케이션(tourification)이 그것이다.

젠트리피케이션은 물리적 공간을 대상으로, 미디어타이제이션은 정신적 공간을 대상으로, 투어리피케이션은 소비 공간을 대상으로 전개된다. 요컨대 미술관을 비롯한 문화공간을 건축하고 예술 행사들을 일상적으로 펼치며[젠트리화], 미디어를 통해 이 사실들을 유통시키고[미디어화], 사람들이 그것들을 보러 오도록 유혹하는[투어화] 것이다.

이것들은 다중들의 창조활동과 인지적 소통, 그리고 다차원적 교류를 가치축적망 속에 가두는 스펙터클 장치들이다(조정환, 2015, 214). 또 이러한 스펙터클들이 예술가, 기술자, 지식인 등을 앞세워 전개된다는 사실은 스펙터클 도시가 ‘공통장’을 창조하는 예술인간적 능력에 기초한다는 것을 반증한다.

랜드마크의 구축, 예술 프로그램들, 문화예술적인 투어 등이 물리적ㆍ정신적 생산공간과 소비공간 모두에서 도시를 갱신하는 (자본의 입장에서는 이윤을 창출하는) 수단이 될 수 있는 것은, 네그리가 말하듯, “예술은 도시 속에서 ‘공통장’으로 기능할 특이한 언어를 발명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Negri, 1989, 40). 다시 말해, 예술이라는 형식의 특이성을 기초로 한 집단적 결정과 공통적인 협치의 사례를 제시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도시의 갱생은, 그것이 자본주의적 축적의 수단이 되는 경우에도,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사랑을 받는 이러한 공통성의 예술형식, 예술인간적 다중의 힘을 필요로 한다.

< 메트로폴리스의 스펙터클化 과정 >
 ┕ 젠트리피케이션 = 물리적 공간을 대상으로
 ┕ 미디어타이제이션 = 정신적 공간을 대상으로
 ┕ 투어리피케이션 = 소비 공간을 대상으로 전개

 

5. 인지자본주의에서 ‘공통장’으로부터의 배제와 소유도시

■젠트리피케이션
서울 도심지에서 벌어진 사례를 놓고 생각해 보자. 건물주가 된 싸이가 추방시킨 한남동 ‘꼼데거리’의 테이크아웃드로잉, 이곳은 작가들의 작업공간이자 전시공간이자 동시에 서점이자 카페였다. 영화 <건축학개론>의 주인공이 앉아서 차를 마신 촬영지로 이용됐다.

이곳은 삼성 리움(leeum) 바로 아래 쪽에 위치하고 있지만, 리움과 같은 권위적인 화이트큐브를 거부하고 지역 및 예술가들과 밀접히 소통하는 ‘접는 미술관’을 추구했다. 정부로부터 지원금을 받아 연명하는 예속적 창작방식의 대안으로 선택한 것이 바로 커피 열풍을 적용한 ‘예술레지던시 카페’였다.

▲ 가수 싸이와의 법적 공방에서 결국 패소, 2016년 8월 영업을 만료로 점포를 비운 한남동 테이크아웃드로잉 전경(자료사진).
테이크아웃드로잉이 예술가에게 일정 기간 동안 카페공간 전부를 작업실로 제공하면, 작가는 그 지역이나 카페를 방문한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그들의 창작물로 카페를 채운다.

카페를 방문한 사람들은 커피를 마시는 고객이기도 하지만 예술가의 창작을 고무하는 창작참여자이고, 또 예술작품을 즐기는 관람자이기도 하다.

타블로이드판으로 제작되는 메뉴판은 ‘테이크아웃드로잉’의 소식 과 작품을 소개하는 일종 의 신문으로 역할을 하며 음식들도 입주한 작가의 주제를 재해석 해서 만들어지는 작품들이다.

테이크아웃드로잉이 입주한 후, 맞은 편에 삼성계열사가 패션매장 꼼데가르송을 열면서 이 지역은 ‘꼼데가르송 거리’로 불리게 된다. 일명 ‘꼼데거리’라는 이름의 예술, 전시, 패션의 공간으로 부상한다. 지대를 상승시키는 한 요인으로 작용한 것은 분명하다.

▲ 제일모직에서 운영하는 꼼데가르송 플래그십 스토어. 일본 유명 디자이너 레이 가와쿠보의 의류브랜드 편집샵. 판매보다 실험적 디스플레이와 전시가 목적이다. 레이 가와쿠보가 건축디자인을 총괄했다(출처: designdb).
테이크아웃드로잉과 꼼데거리, 그러나 이곳의 건물가치가 상승한 것은 건물주가 노력한 결과 아니다.

예술적 감수성으로 공간을 변화시키고 유통시키면서 사람들을 끌어들였던 예술가들, 그들의 활동에 참여하고 관람하고 그 공간을 사용한 이용자들, 주변의 거리를 가꾸고 지켰던 지역 주민들과 노동자들, 그리고 그 지역의 성격과 어울리는 가로수 심기와 관리 등과 같은 주변환경에 대한 공적투자들, 미디어의 주목과 재현, 해당 지역을 찾은 관광객 등의 만들어낸 결과이다. 요컨대 ‘공통장’의 확장이 가져오는 이른바 ‘외부효과’이다.

그런데 문제는 건물주에게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권에 기초하여 가치상승의 효과를 지대차액으로 독점할 수 있는 권리가 있기 때문에, ‘공통장’의 확장에 기여했음에도 상승한 지대를 지불할 능력이 없는 예술가들이 추방되는 역설적인 과정이 전개되는 것이다.

■공통장에서의 추방

‘공통장’을 형성한 후에 그것으로부터 추방되는 것은 예술가라는 특수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만이 아니다. 자연공간과 사회공간에서는 예술가라는 직업을 갖지 않은 무수한 생명개체들이 ‘공통장’의 구성요소임에도 불구하고 배제되고 추방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자연은, 헤아릴 수 없고 가시적이지도 않은 수많은 생명 개체들의 공동의 작품이다. 또 마을은 마을주민들과 방문객들, 그 외의 다른 많은 행위자들이 함께 가꾸고 지켜가는 ‘공통장’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람들과 존재들의 감성적이거나 예술적인 노력 없이 자연 혹은 마을은 구축되지도 유지되지도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자연과 마을은 집단창작품이며, 이런 의미에서 자연과 마을에서의 삶은 예술로서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적이고 자본주의적인 ‘젠트리피케이션’은 수익성 있는 사용(즉, ‘공통장’의 자본주의적 사용)을 위해 이러한 ‘자연적인 공통장’과 ‘사회적인 공통장’을 파괴한다.

제주 강정마을의 구럼비를 깨뜨리고 평화롭던 마을을 순식간에 군사훈련용 해군기지로 만드는 것은 ‘자연적이고 사회적인 공통장’을 깨뜨린 하나의 예이다. 수도권 전기공급을 위해 원자력발전소와 도심지를 잇는 구간에 송전탑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밀양의 자연환경과 마을공동체를 깨뜨린 것도 같은 사례이다.

이외에도 수많은 신도시의 건설 과정은 이미 무수히 많은 ‘자연적ㆍ사회적 공통장’을 파괴해 왔다. 주지하다시피 그것은 또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공통장’으로부터 분리시켰다 즉, 강제이주를 가져왔다. - ‘광주대단지 사건’으로 불리는 1971년 성남지역 일대의 주민봉기는 이러한 조치에 대한 대규모 저항이었다.

미디어타이제이션

 
추방은 좀 더 인지적인 공간인 ‘미디어스케이프’에서도 전개된다.
신문, 방송, 디지털 매체 등 미디어는 과학기술의 집단지성적 발전과 그것을 이용하는 ‘공중의 형성’에 의해 형성되는 ‘공통장’이다.

오늘날 미디어스케이프에서 다양하고 이질적인 이용자의 참여가 확대되면서, 미디어를 다중의 ‘공통장’이라 부를 수 있게 되었지만, 미디어스케이프에서도 배제되는 이들이 있다.

가난한 사람들, 이주민과 동성애자 등 소수자들은 미디어스케이프의 스크린이나 지면에서 배제되어 그 존재 자체가 은폐된다.

랜드스케이프에서 빈민촌, 슬럼가, 사창가 등이 가려지고 은폐되듯이, 미디어스케이프에서 다양한 소수자들의 목소리와 얼굴은 체계적으로 차단된다.

미디어에서의 배제되면 폴리스케이프(Political Landscape)에서도 제대로 재현되기 어렵다. 폴리스케이프가 미디어스케이프에 의해 규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소수자들이 자신을 대의할 정치가나 정치정당을 갖기도 어렵지만, 어렵사리 그러한 정치가나 정치정당을 확보한 경우에도 미디어스케이프에서 집중적으로 공격당하고 철저히 배제됨으로써 그 존재조차 인정받기 어렵다.

‘공통장’으로부터 추방과 배제, 표현에 대한 금지와 재현에 대한 제한은 이처럼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에 근거한 신자유주의 스펙터클 도시의 작동 메커니즘이다. - <다음호에 계속>

정리= 한국건설신문 이오주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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