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설인문학⑲> 누구나 예술가이기를 강요받는 ‘인지자본주의 노동자들’
<건설인문학⑲> 누구나 예술가이기를 강요받는 ‘인지자본주의 노동자들’
  • 이오주은 기자
  • 승인 2017.01.19 13: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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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환 정치철학자 (다중지성의정원 대표)

희망의 도시, 어떻게 이론화할 것인가_(2)예술인간의 탄생과 반자본주의적 공통도시의 전망
 

누구나 예술가이기를 강요받는
‘인지자본주의 노동자들

 

 

< 강제된 창조활동의 산물=스펙터클 풍경 >

  ┕ 자본축적을 위해 실제풍경을 가상풍경으로 대체ㆍ은폐
  ┕ 창조활동, 더 이상 생명활동 아냐… 생활수단으로 변질
  ┕ 스펙터클 속에서 예술인간의 잠재력은 냉소기계의 에너지로 기능
 

4. 스펙터클 도시와 예술인간, 그리고 공통장


▲ 조정환, 정치철학자
(다중지성의 정원 대표)
<본지 693호에 이어> 이렇듯 스펙터클 도시가 자신의 ‘분열되고-위험하고-고압적인 다른 얼굴’을 가리면서, 자신을 마치 ‘친밀하고-자상하며-다정한 봉사의 주체’인 듯 내세울지라도, 스펙터클의 시청자들은 끊임없이 채널을 돌린다.

주어진 채널 사이에서 이루어질 뿐이라 해도, 이 채널돌림은 시청자들이 스펙터클 이미지에 점점 시들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는 그들이 권태로워하고 있다는 사실, 뭔가 새로운 것을 원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일종의 고통 증상이다.

왜 시청자들은 화려한 이미지로 포장된 스펙터클의 친절하고도 자상한 봉사활동을 권태로워 하는 것일까?

권태는, 지금은 스펙터클의 구경꾼으로 배치되어 있는 그들 자신이 사실은, 스펙터클로 통합되는 무수한 구성 요소들(인간적ㆍ기계적ㆍ사물적)의 창조자라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스펙터클 도시 자체가 자신의 창조물임에도, 그 도시가 자신으로부터 분리되어 자신을 무력하게 만드는 장치로 기능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권태의 계기가 주어진다.

산업자본주의에서 ‘노동자’들이 자신이 생산한 생산수단과 생산물 그리고 공장으로부터 분리되어 소외되듯이, 인지자본주의에서 ‘창조자’들은 자신이 생산한 기계장치와 이미지, 그리고 도시로부터 분리되어 소외된다.

스펙터클은 창조물들이 창조자로부터 분리됨으로써 생겨나는 도착의 효과이다. 스펙터클 도시는 그 창조자들을 그들 자신의 도시로부터 체계적으로 분리시키고 소외시키는 장치이다.

텔레비전이 온종일 쏟아내는 이미지는 정보의 홍수를 이루지만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할 뿐이다. 폭포처럼 쏟아지는 정보들은 시청자의 감각과 지각 양식 즉, 정동구조와 사유양식을 그들 자신의 ‘삶의 필요’로부터 분리시킨다. 이것이 혼란의 대표적인 예이다.

정치권력이 자본의 이익을 ‘국익’으로 선언하고, 사법 권력이 부르주아(사적 소유자들)의 이익을 ‘정의’로 심판하며, 사유화된 국가나 소수의 대주주들에 의해 장악된 미디어 기구들이 본질적으로 사적인 이해관계를 ‘공익’(공중의 일반이익)으로 제시하는 현실.

이 현실에서 스크린, 모니터, (신문)지면을 채우는 스펙터클의 풍경들은 인지적 창조자들의 삶의 행복과는 배치되는 풍경들, 다시 말해 고통스러울 정도로 지루하고, 역겨울 정도로 외설스럽고, 슬플 정도로 맹목적인 풍경들이다.

이러한 풍경의 일상적 반복이 우리의 지각습관을 고정시키고, 정동능력을 교란시키며, 행동능력을 침식한다.

만약 도시에서 스펙터클 장치에 의한 분리가 없어진다고 가정해 보면 어떨까? 그러면 (마르크스가 그려본 것처럼) 도시의 삶에서 대상들의 상호적 가치가 우리들 자신의 상호적 가치로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도시에서 스펙터클 장치에 의한 분리가 없어진다면?>
  ┕ 개성적 활동 속에서 자신의 본성 향유
  ┕ 타인의 본질적 필요에 부응했다는 만족
  ┕ 다른 이의 사랑에 머무는 자기자신을 인정


먼저, 도시의 창조자들인 다중의 생산과정이 그들의 개성과 특이성을 대상화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창조자(다중)들은 자신의 개성적인 생명외화를 향유할 것이다.

그 대상들을 직관하면서 자신의 개성적인 기쁨을, 감각적으로 직관 가능한 것으로써 자신의 인격을 향유할 것이며, 그리하여 의심할 수 없는 자신의 힘을 향유할 것이다(마르크스, 2013, 208-209).”

둘째로, 도시에서 다중의 생산물을 타인이 향유하고 사용하는 동안에 다중은, “자신의 노동에 의해 타인의 인간적 필요를 만족시켰다는 의식을, 인간적 본질을 대상화했다는 의식을, 그리하여 다른 인간적 본질들의 필요에 부응하는 대상을 창조했다는 의식을 직접 향유할 것이다(마르크스, 2013, 209).”

셋째로, “당신에게 있어서 나는, 당신과 유(類, Gattung) 사이의 매개자일 것이고, 당신 자신에 의해서 나는 당신의 고유한 본질들의 보충으로 또 당신 자신의 필연적 일부로 인정되고 또 느껴지게 될 것이며, 나는 당신의 생각과 당신의 사랑 안에서 내가 인정됨을 알 수 있을 것이다(마르크스, 2013, 209).”

넷째로, “나의 개성적인 생명의 외화 속에서, 나는 당신의 생명의 외화를 직접 경험할 것이고, 나의 개성적 활동 속에서 직접적으로 나의 진정한 본성을, 나의 인간적 본질을, 나의 공동본질(Gemeinwesen)을 입증하고 실현할 것이다(마르크스 2013, 209).”

이렇게 자유로운 생명외화이고 그 생명의 향유일 다중의 상호적 창조와 향유의 활동은, 사적 소유와 그에 기초한 스펙터클적 분리의 장치를 매개로 그 창조자로부터 분리되어 생명소외로 귀착된다.

이렇게 되면 창조활동은 살기 위해 또 생활수단을 조달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수행하는 활동으로 변질된다. 창조활동은 더 이상 생명활동이 아니게 된다.

“그리하여 나의 개성과 나의 활동은 내게 증오스럽게 느껴지고, 고통이 되고, 나의 활동은 활동의 가상과 다름없는 것이 될 정도로, 그리하여 내적으로 필연적인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단지 외적이고 우연적인 필요에 의해서 나에게 강요된 활동이 될 정도로 소외된다(마르크스, 2013, 210).”

자신의 강제된 창조활동의 산물인 도시가 자신으로부터 분리되어, 물끄러미 바라봐야만 하는 이미지(대상)로 나타날 때, 그것은 자기상실과 무기력의 명백한 표현이 되며, 오직 권태만이 자기상실과 무기력의 표현이자 그것에 대한 약한 거부를 함축하는 이중의 감정으로 출현되게 된다.

스펙터클 앞에서 느끼는 다중의 권태감은 그러므로 다중 자신이 ‘인간적 공동본질’, 즉 공통장의 창조자라는 사실을 증언하는 역설적 현상이고 ‘스펙터클적 도시 관계’와는 다른 도시 관계와 도시 형태를 창조할 필요성에 대한 증언이기도 하다.

『예술인간의 탄생』에서 서술했듯이, 스펙터클 도시는 부르주아적 사적 소유 체제 하에서 예술인간 도시가 나타나는 도착적 이미지이다(조정환, 2015, 210-220).

그렇다면 스펙터클이 도착적 현상임에도 불구하고 예술인간들의 창작품이라는 사실은 무엇을 함의하는가?

오늘날의 다중은 창조하도록 요구받을 뿐만 아니라 창조를 통해서만 그 존재이유를 입증 받는다.

지식ㆍ정보ㆍ상징ㆍ정서ㆍ소통 등이 생산의 주요 영역이 되고, ‘독창성’이 지적재산권의 핵심적인 축으로 규정되는 엄연한 현실은, 다중들로 하여금 매순간 ‘인지적 창조능력’을 보이도록 강제한다.

지식이나 상징을 직접적으로 생산하고 유통시키는 활동은 말할 것도 없고, 돌보고 보살피는 활동에서도 ‘남다름’과 ‘창조성’이 요구된다. 이러한 능력들을 소통하면서 축적된 플랫폼이 늘어날수록 ‘남다르게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의 의미’는 더욱 커진다.

 
편리함ㆍ편안함ㆍ즐거움ㆍ따뜻함ㆍ달콤함ㆍ멋짐ㆍ귀여움ㆍ안전함ㆍ만족함ㆍ빠름ㆍ화끈함ㆍ무서움….

이처럼, 심지어 사물의 생산조차 감각적이고 감성적인 것을 생산하기 위한 구성 요소로 위치 지어지면서, 감각적이고 감성적인 창조성에 대한 요구는 한층 커진다.

지금까지 예술가들이 보여주었던 능력과 자질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재화를 생산하는 다중들에게 보편적으로 요구되는 능력과 자질이 되었다.

누구나가 예술가이기를 요구받고 있고 또 그렇게 되고 있다. 이러한 현실이야말로 예술인간의 탄생과 성장의 조건이다.

‘스펙터클 풍경’은 다중의 이 모든 예술적 창조능력을, 자본과 권력의 축적이라는 목적에 맞추어 포획하고, 집적ㆍ집중시키고 편집하고 재구성한 산물이다.

그 결과 개별적 수준에서 다중의 다양한 지식들은, 사회적 수준에서 집합적인 무지를 낳는 소음들로 배치된다.

따뜻함과 달콤함을 생산하는 능력은 양극화된 사회의 잔인하고 냉혹한 풍경을 가리는 스크린으로 작용한다.

안전함과 만족함을 생산하는 능력은 사람들이 경험하는 위험, 불안, 공포를 잊게 만드는 위안기제로 작동한다.

다중의 부단한 중얼거림과 소통의 능력은 스펙터클 속에서 소통의 극단적 단절과 고독함을 창출하는 것으로 귀결되며, 새로운 것을 생산하는 능력은 스펙터클 속에서 더 없이 낡고 타성적인 것의 무한반복이 된다.

이처럼 스펙터클 속에서 예술인간의 잠재력은 냉소기계의 에너지로 기능하며, 그 속에서 ▷가상풍경과 실제풍경의 분리, ▷가상풍경에 의한 실제풍경의 은폐, ▷실제풍경의 가상풍경으로의 대체가 체계적으로 생산되는 것이다. - <다음호에 계속>

정리= 한국건설신문 이오주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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