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설인문학⑱> 스펙터클 투어시티… 축적의 도시, 은폐의 도시, 위기의 도시
<건설인문학⑱> 스펙터클 투어시티… 축적의 도시, 은폐의 도시, 위기의 도시
  • 이오주은 기자
  • 승인 2016.12.28 11: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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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조정환 정치철학자 (다중지성의정원 대표)

희망의 도시, 어떻게 이론화할 것인가_(2)예술인간의 탄생과 반자본주의적 공통도시의 전망

스펙터클 투어시티...
‘축적의 도시, 은폐의 도시, 위기의 도시’  
 

 


< 인지자본주의의 시간 >
┗ 투어리즘의 시간… 삶 그 자체로 관광, 누구나 관광객, 매일이 관광
┗ 기술로 매개된 스펙터클 속에서 이미지로 관계 맺는 ‘세계-풍경’
┗ 창조도시의 실상… 모든 사람을 수동적인 ‘구경꾼’으로 만드는 구조


3. 스펙터클 투어시티와 그 구성요소

▲ 조정환, 정치철학자
(다중지성의 정원 대표)
<지난 호에 이어> 사진기술이 인간의 지각을 ‘손’에서 ‘눈’으로 옮긴다고 말한 사람은 발터 벤야민이다. 그런데 오늘날 인간의 눈은 생물학적 눈이라기보다 기계에 의해 매개된 ‘기술의 눈’이다.

하늘을 나는 드론 기술은 ‘인간의 눈’의 원근지각 외에 ‘새의 눈’의 부감지각을 가능하게 만든다. 원근경험이 부분을 구체적으로 지각하는 것이라면, 부감지각은 전체를 조망하는 지각이다. 편집은 이 두 지각양식을 결합시킬 것이다.

[드론]에 앞서 [인공위성]은 부감지각을 대중화시켰다. [구글맵]은 우리에게 부감된 지도의 풍경을 제공한다. 오늘날의 [투어]는 단순한 둘러봄이 아니다. 여행하는 사람들은 인공위성의 눈으로 본 지도에서 여행할 곳을 선정한 후에 그곳을 미리 둘러본다. 전체적 조망이 부분적 둘러봄에 선행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전체와 부분의 편집, 원근법과 부감법의 결합을 일반화시킨다. 

금융자본은 세계 전체를 광속으로 돌아다니는데, 그 투어는 지구 전체의 기업분포를 조감한 후에 국지적 투자지역을 결정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미국의 전쟁 투어 역시 지구의 분쟁지역에 대한 전체적 조망 위에서 국지적으로 수행된다. 높이의 기술이 거리와 넓이를 지배한다.

‘투어지각’의 범위는 점점 넓어지고 있다. 그것은 휴일활동에 국한되었던 일상의 관광지각을 넘어서, 레저ㆍ일 (사업 ) 또는 그 외의 목적으로(꽤 장기적으로), 자신의 통상적인 환경 외부에 머무르면서 이동하는 지각형태 모두를 가리키기도 한다.

이러한 지각형태는 점점 일반화된다. [워킹 홀리데이]에서 보듯이 노동이나 학업까지도 ‘투어적 지각양식’, 즉 관광객적이고 구경꾼적인 지각으로 나타난다.

이 뿐일까? 기 드보르는 이 ‘구경꾼적 지각양식’의 출현을 ‘자본주의의 변형’과 연결시킨다. 이러한 지각양식은 사회생활의 이미지들이 거대한 스펙터클의 축적이 되고, 직접 체험한 것들이 단순한 이미지로 재현되는 자본주의 단계의 산물이라는 것이다(Debord, 1992).

가라타니 고진이 근대화와 연결시켰던 ‘외부세계의 풍경화’는 ‘세계의 스펙터클화’ 속에서 더욱 거대하게 재생산된다. 일상의 삶으로부터 분리된 이미지들은 하나의 공동의 흐름 속으로 녹아들고, 실재는 관조의 대상이 되어, 하나의 보편적 유사세계로서 비-삶의 자율적 운동, 삶의 구체적 전도로서의 스펙터클이 된다는 것이다.

기 드보르는 스펙터클이 단순히 이미지들의 집합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들에 의해 매개되는 사람들의 사회적 관계라고 표현한다.

그렇다면 스펙터클에서는, 가라타니의 경우에서처럼 풍경에서 독립된 ‘내면화된 인간’이 풍경 저 건너편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기술적으로 매개된 스펙터클 속에서 서로 관계 맺는 구경꾼들만이 있을 뿐이다.

‘기 드보르의 스펙터클론’은 주로 영화를 염두에 둔 것이지만, 우리 시대에는 텔레비전이 스펙터클을 일반화하는 대표적인 장치가 되었다.

텔레비전을 통해 이미지의 삶이 보편적 삶의 형태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성별ㆍ계급ㆍ인종을 가리지 않고 누구나 텔레비전 화면에 구현되는 풍경화된 세계 즉, ‘세계-풍경’과 관계를 맺는다.

컴퓨터그래픽(CG)은 실제 체험을 넘어서는 환상적인 세계를 꾸며내고, 초고속카메라는 극사실적 장면을 연출한다.

안방의 시청자들은 카메라가 이동하는 경로를 따라 세계 구석구석을 구경할 수 있으며, 인공위성 카메라를 통해 격전지의 생생한 상황까지 현장감을 느끼며 응시할 수 있다.

나아가 문자발생기를 이용한 문자, 기호ㆍ도표ㆍ만화ㆍ이모티콘 등을 활용한 영상자막은 시청자가 직접 느끼고 사고할 필요성을 없애면서, 제작자의 감각양식과 지각양식을 시청자에게 고스란히 부여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구성된 ‘미디어스케이프’가 ‘랜드스케이프’로 전화하면서, 이제 모든 사람은 집 밖으로 나가지 않고도 ‘세계-풍경’과 관계 맺을 수 있는, 이미 구경꾼이며 관광객이다. 누구나가 관광객이며 매일이 관광시간이다. 삶은 그 자체로 관광, 즉 경관을 구경하는 투어이다.

‘투어리즘의 시간’은 이제 휴일에 국한되지 않는 매일이며, 그 공간은 특정한 장소에 국한되지 않는 모든 곳이고, 특정한 계층에 속하지 않는 모든 사람이 투어리즘의 행위자들이다.

이렇듯 거대하고 복잡한 이미지들이 축적되어 연속적이고 독자적인 흐름으로 나타나는 스펙터클은, 사람들을 항상적 투어리스트로 만들면서 자기 자신을 유일무이한 삶으로 주장하게 만든다. 이러한 시간이 [인지자본주의의 시간]이다.

스펙터클화된 자본만이 유일한 주체성으로 나타나는 이 보편적 시간 속에서, 시청자들은 고전적 의미에서의 ‘구경꾼’이라고 불리는 것조차 부적합할지도 모른다.

오히려 그들은, 구경을 위해 필요한 흥미나 관심은 물론이고, ‘내면화된 자신’조차 잃어버린 채, 미디어화된 랜드스케이프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관찰카메라’를 닮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거대하고 화려하며 사실적인 가상들을 통해 사람들을 이처럼 수동화시키는 스펙터클 도시, 흔히 ‘창조도시’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불리는 이 도시는 어떠한 얼굴, 어떤 관계들을 감추고 있는 것일까?

첫째로 신자유주의적 스펙터클의 도시는 ‘축적의 도시’이다. 

이미지의 거대한 축적은 무엇보다도 금융화된 자본의 거대한 축적이며, 미디어화되고 무수히 반복되는 도시의 풍경들은 세계에 대한 지각양식을 자신의 필요에 맞게 고정시키는, 거대하게 축적된 권력이다. 이 도시는 더 큰 부가가치, 더 큰 이윤, 즉 자본의 더 큰 축적을 향해 정향된다.

 
둘째, 스펙터클 도시는 ‘은폐의 도시’이다.

스펙터클은 통합된 모습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양극화된 도시, 두 개로 분열된 도시의 모습을 은폐한다.

마이크 데이비스가 분석하듯이, 마천루가 즐비한 도시의 뒷골목에는 그것들의 그림자처럼 넓게 슬럼이 펼쳐져 있다(Davis, 2006). 스펙터클은 슬럼에서 전개되는 범죄를 집중적으로 노출시켜 악마화하고, 이 사실에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킴으로써 실제 마천루에서 전개되는 더 큰 범죄들은 은폐한다.

- <편집자주> 마이크 데이비스(Mike Davis, 1946~)는 미국에서 활동하는 마르크스주의 작가ㆍ정치활동가ㆍ도시이론가ㆍ역사가이며, 울리히 벡(Ulrich Beck, 1944~2015)은 독일의 사회학자이다.

셋째로 스펙터클 도시는, 울리히 벡이 분석하듯이 ‘위기의 도시’이다.

근본적으로 과학기술의 가상에 의존하는 스펙터클 도시는, ▷핵위기 ▷환경위기 ▷교통위기 ▷전쟁위기 등, 다가오는 혹은 이미 닥친 재난의 얼굴을 숨김으로써, 스펙터클 도시의 저변에서 발생/발전하고 있는 이 재난적 위기들이 사람들의 평상적 지각능력을 벗어나게 만든다.

또 위험은 도시의 양극화된 구조에 따라 다르게 분배되는데, 스펙터클은 위험에 다량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노출된 사람들의 지각을 ‘수동적인 구경꾼적 지각’으로 구조화함으로써 위험에 대한 도시의 대응 능력을 위축시킨다. - <다음 호에 계속>

정리= 한국건설신문 이오주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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