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설인문학⑰> 미디어화된 풍경, 산업자본주의에서 ‘인지자본주의’로의 이행
<건설인문학⑰> 미디어화된 풍경, 산업자본주의에서 ‘인지자본주의’로의 이행
  • 이오주은 기자
  • 승인 2016.12.21 13: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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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환 정치철학자 (다중지성의정원 대표)

희망의 도시, 어떻게 이론화할 것인가_(2)예술인간의 탄생과 반자본주의적 공통도시의 전망

미디어화된 풍경,
산업자본주의에서 ‘인지자본주의’로의 이행

 

풍경의 미디어화… 미디어화됨으로써만 풍경으로 간주하는 문화
TV인터넷ㆍ스마트폰은 랜드스케이프를 ‘미디어스케이프’로 만들고
‘카메라를 앞세운 미디어화’와 ‘예술가를 앞세운 젠트리화’


▲ 조정환, 정치철학자
   (다중지성의 정원 대표)
<본지 제 688호에 이어> 오늘날도 확대되고 심화되어 더욱 변형된 형태로 재생산되고 있는 성적ㆍ인종적ㆍ계급적 착취와 수탈의 장면들, 이러한 ‘시초축적의 미시적 요소’들은, 자본주의적 근대도시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의 외연적 경도들을 가져오는 내포적 진동들, 즉 위도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필자는 들뢰즈의 표현을 빌어 “위도(latitude)는 서로 다른 역량들이 자신들의 한계에 따라 나타내는 내포적이고 강도적인 정동(affects)의 장”이고, “경도(longitude)는 물질적 요소들이 이루는 집합으로서 외연적 부분들이 특정한 관계 아래에서 조직되는 것을 지칭한다”고 설명한다.


2. 풍경의 ‘발견’과 풍경의 ‘창조’

일반적으로 도시의 외연적 경도는 ‘풍경’으로 나타난다. “풍경이 외부세계에 관심을 갖지 않는 근대의 내면화된 인간에 의해 도착(倒錯)적으로 발견되었다”는 것은 가라타니 고진의 생각이다(柄谷行人, 1980, 11). - <편집자주> 가라타니 고진(1941~ )은 일본의 문예평론가이자 사상가다.
그런데 근대화란, 무관심한 마음으로 외부세계를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이기보다 그것을 가공 가능한 것으로, 변경할 수 있는 것으로 파악하기 시작한 시대가 아니었던가? 다시 말해 풍경을 창조 가능한 것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 근대화의 효과가 아니었던가? 근대 이후에 자연이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근대 이전의 자연이 인간이 깃들어 주어진 집이라는 의미를 가졌다면, 근대 이후에 그것은 아직 인간의 가공이 가해지지 않은 것, 하지만 인간이 주체로서 자신의 것으로 가공할 수 있는 대상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자연은 이제 인간의 것, 즉 능동적 인간의 ‘비유기적 몸’(마르크스)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인식은 ‘외부세계에 관심을 갖지 않는 내면화된 인간’이라는 가라타니의 표상과 모순된다. 외부세계에 대한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관심이 근대화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이 모순은 세계인식의 계급적 분화를 고려하지 않고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세계를 자신의 것으로 파악하면서 세계에 대한 능동적 관심을 표현했던 것은 부르주아지였다. 프롤레타리아에게 있어서 세계는 부르주아지의 것이며 자신이 관심을 가질 수 있는 대상이 아닌 것으로 파악되었음이 고려되어야 한다.
프롤레타리아는 노동을 통해 이 세계를 실제로 변화시키는 능동신체이지만, ▷사적 소유체제 하에서 강제되는 생산수단으로부터의 소외, ▷생산물로부터의 소외, 그리고 ▷자기자신으로부터의 소외와 같은 몇 겹의 소외로 인해 세계로부터의 소외를 겪게 되고, 외부세계에 대한 무관심이라는 수동성의 특징을 갖게 되었다고 추론할 수 있다.
따라서 가라타니가 말하는 ‘내면화된 인간’이란 근대인 일반의 특징이 아니라 근대의 프롤레타리아의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 특징은 사적 소유체제에 의해 부과되고 강제된 것으로서, 외부세계에 무관심한 그 ‘내면화된 인간’ 자신이야말로 외부세계를 실제로 개조하고 창조하는 바로 그 주체라는 사실이 지워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근대 이후에, 주어진 풍경들을 깨뜨리면서 도래하는 외부세계에 대한 관심들, 풍경을 자신의 세계로 전유하고자 하는 운동들, 아래로부터의 반란과 혁명들이 그것을 증언한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풍경은 모순과 갈등 속에서 드러나는 하나의 긴장된 사회사적 사건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산업적 투어리즘과 제주도 국제관광도시화의 실상

풍경이 여러 사회적 장치들의 긴장 속에서 꾸며지는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제주도의 영등굿은 바다의 신인 ‘영등할망’을 모시는 굿으로 매년 음력 2월 1일부터 2월 15일 사이에 행해진다. 1일의 굿을 영등환영제, 15일의 굿을 영등송별제라 부른다.
제주도민들은 영등할망이 강남천자국에 살면서 매년 2월 1일에 제주의 서쪽 끝인 비양도를 통해 들어온 후 보름에 제주 동쪽 끝인 우도를 거쳐 본국으로 떠나기까지 한라산과 제주바다를 돌며 꽃씨를 뿌리고 들판에는 오곡의 씨를 바다에는 소라, 전복, 해삼 등 해산물의 씨를 뿌린다고 믿어왔다.
영등제는 이 영등할망을 지극정성으로 모셔 풍농풍어를 기원하는 전통적 의식(儀式)이다. 이 제사굿은 이 보름간에 걸쳐 영등할망의 이동시간을 고려하면서 제주 전역에서 순차적으로 진행된다.
2016년 음력 2월 14일 제주 동북쪽 북촌리 영등제에는 십 여 대의 카메라와 수 대의 드론이 동원되어 ①큰대세움 ②초감제 ③요왕맞이 ④씨드림 ⑤지아룀 ⑥산받음 ⑦배방선에 이르는 전 과정을 촬영했다.
영등신을 본국으로 보내는 제차로서 스티로폼으로 작은 배를 만들고 거기에 여러 가지 제물을 조금씩 실어 바다에 띄워 보내는 배방선 절차에서는, 보트에 탄 카메라맨들이 제물을 어선에 싣고 바다로 나가면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는 해녀들의 모습을 촬영했다.

 
지상, 상공, 해상에 걸친 입체적 시점에서 ‘풍경’이 만들어진 것이다. 다음날 우도에서 열린 영등송별제에는 카메라맨만이 아니라 (제주 민예총 소속의) 예술가들도 참여하여 영등제의 풍경화에 한 몫을 했다.
무당과 드론의 이러한 마주침, 그리고 오래된 전통축제와 포스트모던 영상기술의 만남, 그리고 방송과 주민 및 지역예술가들의 이러한 연결은 원주민들의 전통축제를 관광상품화하여 부가가치를 창출한다는 도시의 산업기획의 일부다. 이런 방식으로 제주도가 품어온 영등제 풍습은 미디어화를 통해 일종의 미디어마크가 됨으로써 랜드마크 제주도에 다른 풍경을 부여한다.

■미디어화되지 않은 풍경은 더 이상 풍경이 아니다

풍경은 이제 더 이상 자연풍경이나 사회풍경만이 아니다. 풍경은 점점 미디어화되고 있고 또 미디어화됨으로써만 풍경으로서 기능한다. 산업자본주의에서 인지자본주의로의 이행은 점점 미디어화되지 않은 풍경을 더 이상 풍경으로 간주하지 않는 문화를 만들어 내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텔레비전, 인터넷, 스마트폰은 랜드스케이프를 ‘미디어스케이프’로 만들어내고 다시 미디어스케이프를 랜드스케이프로 만들어 내는 장치들로 기능한다. ‘카메라를 앞세운 미디어화’와 ‘예술가를 앞세운 젠트리화’를 통해 추진되는 산업적 투어리즘이 제주도의 국제관광도시화의 실상인데, 이것은 ‘풍경의 발견’을 넘어 ‘풍경의 창조’를 통해서 추진되고 있다.
그러므로 풍경의 혁신을 사유함에 있어서 현대도시의 풍경을 낳는 내적 진동들, 그 내포적 위도들을 파악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로 주어진다. - <다음 호에 계속>

정리 = 한국건설신문 이오주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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