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왕립원예협회 등장…대중적 취향의 정원 문화 조성 영향
영국 왕립원예협회 등장…대중적 취향의 정원 문화 조성 영향
  • 정리=주선영 기자
  • 승인 2016.07.20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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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과 원예’ 공존으로 ‘영국적 정원문화’ 시너지 일으켜
‘영국 정원문화의 대중화 전개 양상에 대한 연구’

한국건설신문 주선영 기자 = 영국은 정원의 역사와 문화가 대표되는 국가로서, 크고 작은 비영리 단체 및 자선단체들이 활동을 하고 있다. 이중 왕립원예협회(RHS)는 영국의 정원문화 및 산업의 저변확대에 큰 영향을 준 핵심단체이다.
성종상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교수와 조혜령 서울대학교 협동과정 조경학 박사과정생은 한국조경학회지(통권 175호)에 게재한 ‘영국 정원문화의 대중화 전개 양상에 대한 연구’를 통해 RHS의 등장 배경과 전개 과정을 통해 전문 자선단체로서 정원문화 대중화에 기여한 전개 양상과 그 가치를 살폈다.
연구에 따르면, 19세기 빅토리안 시대의 식물 수집에 대한 열정은 협회 창립의 배경이 됐으며, 영국의 시민정원문화와 관련이 깊다. 이에 본지는 연구(19세기 RHS의 활동을 중심으로) 내용을 정리해 봤다.

▲ <사진제공=라펜트>

■RHS의 등장과 시대적 배경

1804년 3월 7일, 7명의 남자들로 구성된 한 무리가 런던 피카 딜리의 한 책방에 모여 단체 하나를 건립하자는 의견을 모으고 있었다. 그 구성원에는 원예협회 건립에 대한 아이디어를 최초로 제안했던 도자기 가문의 존 웨지우드와 초대 원예 협회장이 된 식물학자 조셉 뱅크스 경, 켄싱턴 궁의 왕립 정원사인 윌리엄 포시스, 큐가든의 왕립 정원사 윌리엄 에이톤, 묘목상 제임스 딕슨 그리고 두 명의 아마추어 정원사와 식물학자인 찰스 그레빌과 안토니 세일스버리였다. 최초의 협회 명칭은 런던원예협회(Horticultural Society of London)였으나, 19세기 중반 재정적 어려움으로 알버트 경과 왕실의 도움을 받아 ‘R’ 칭호를 사사 받음으로써 비로소 왕립원예학회(RoyalHorticulture Society)가 될 수 있었다. 19세기 초 원예협회의 멤버쉽 자격은 귀족성을 겸비한 상류지주계층들로 이루어졌으며, 협회의 구성원과 활동은 근대화로 인한 사회적 변화와 더불어 다채로운 전개 양상을 띠게 된다.


■19세기 RHS의 활동

◇식물사냥꾼과 식물 수집활동= RHS 설립 이후 1821년에서 1864년 사이는 보다 전문적으로 10명의 식물사냥꾼들을 임명해 식물 수집을 후원했다. 새로운 식물들은 이전의 가치에서 벗어나 실용적이거나 과학적 목적을 우선 순위에 두었다.
식물사냥꾼들에 의해 수집된 식물들과 표본들, 종자들은 협회 견본정원으로 보내져서 과학적 연구대상으로 발아실험, 풍토 순응 테스트 등을 거친 뒤 RHS멤버들에게 제공됐으며, 이러한 식물들을 분류하고, 견본정원에 전시했다. 통상적인 이름과 학명, 특징들을 기입한 명패가 붙으면서 식물은 단순히 흥미로운 구경거리에서 ‘앎의 대상’으로 전도된다. 사람들은 개방된 정원(켄싱턴 정원)을 방문하며, 원예적 지식의 폭을 넓힐 수 있었으며, 협회는 원예교육과 교화 모두 만족시키는 목적을 달성했다. 더불어 1833년 판유리의 발명과 11년 후 유리에 대한 세금이 없어지자, 온실수가 급증하게 됐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온실에서 꺾꽂이를 활용한 번식과 이식을 시작, 화려한 색감의 일년생 식물들 사용을 증가시킬 수 있었다. 그 결과, 꽃으로 채워진 화단과 화분들은 큰 유행을 타게 됐다. 이러한 원예의 대중화는 1843년 ‘가드너스 크로니클(Garde-ner’s Chronicle)‘에 게재된 논평에서 확인할 수 있다.
새로운 식물의 도입으로 인한 재배원(Nursery)의 수도 급증했다. 재배원들은 ‘대중’이 좋은 식물들을 구할 수 있게 함으로써 가드닝의 대중성에 불을 지폈다. 재배원에서는 그저 식물을 육성, 번식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정원조성의 목적에 부합하도록 각 식물군들을 길들였고, 현재도 그 점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RHS의 식물 연구 분야는 더욱 구체화됐다. 1858년 과수 및 채소 위원회를 비롯해 1859년에는 화훼 위원회가 설립됐고, 이후 난, 수선화, 튤립 등과 같이 더욱 전문적인 소위원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가든 전문서적 발간= 원예 및 가드닝의 전문서적의 출간은 로우든의 협회 가입 시점으로부터 실천적인 정보와 내용들이 편집됨으로써 대중적(특히, 여성과 중산계층) 독자 폭을 넓힐 수 있었다. 그리해 생산 활동에 소외돼 있던 여성들의 가정적 원예활동은 새로운 정원 양식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여성 회원과 여성정원가의 등장= 1830년 RHS에 여성회원이 등장했다. 남성 중심의 보수적 시대에 여성회원의 등장은 점차 교외로 벗어나기 시작한 중산층 특유의 자급농원 구현과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1826년 로우돈은 정원사의 잡지(Gardener’smagazine) 소개 글에 “정원을 가꾸는 것은 특히 여성을 위한 가정의 여가 활동이다”라고 주장했으며, 그의 아내인 제인 로우돈은 여성독자를 겨냥한 여성을 위한 정원가꾸기(Gardening for Ladies)를 집필했을 정도로 가드닝을 여가와 취미로 즐기는 여성의 참여가 점차 늘어났다.

◇전시와 플라워쇼= 1822년 왕립원예협회는 데본셔 공작에게 치즈윅 땅 13헥타르를 임대받게 된다. 그곳에 처음으로 견본정원을 만들기 시작했고, 다양한 이국적 식물들을 전시했다.
협회 회원들은 계속해서 정기적인 모임을 가지며 강연회 및 세미나를 열고, 2주에 한 번씩 웨스트민스터 사무실 근처의 작은 홀에서 꽃들의 표본과 세밀화 등을 전시하는 작은 ‘꽃 축제’를 가졌다. 그러던 1827년 RHS는 첫 번째 플라워쇼를 개최하게 된다. 이후 1862년, 켄싱턴에서 템플가든으로 장소를 옮기면서 그레이트 스프링쇼(Great Spring Show)를 개최하고, 1913년에는 지금의 자리인 로열 호스피털 첼시(Royal Hospital Chelsea)로 이전하며 ‘첼시플라워쇼(Chelsea Flower Show)’가 탄생하게 된다. 거투르드 제킬 및 관련 주요 인사들은 RHS와 첼시플라워쇼에 관해 영국 정원문화의 중추적 역할을 한다고 언급했다.


■대중적 정원양식과 조원술

19세기 원예협회의 식물 수집은 근대 영국정원디자인을 이끌어낸 원동력이었으며, 식물사냥꾼들의 노력은 오늘날 영국의 대중적 정원의 모습을 만들었다. 그 중심에는 항상 RHS가 역사를 함께 했다. 왕실과, 귀족, 종교 시설 등이 소유하고 즐겼던 정원문화는 RHS의 등장과 다양한 활동들의 전개를 통해 대중적 취향의 정원양식의 발생과 문화를 조성했다. 19세기에 수집된 식물들은 RHS의 연구와 표본용으로만 남아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영국 조경 전체의 그림을 바꾸어 놓았다.
랩톤은 화원구역을 만들거나, 저택 근처에 테라스를 조성해서 꽃 화분을 두는 등 브라운식 정원을 재편했다. 대중에게 개방된 런던의 공원들은 증축되거나 독립적 화원구역을 마련해 주제별 정원 등을 발생시켰고, 도시에서 자본을 축척한 중산 계급들은 교외로 이주하거나 별장을 마련해 수수한 코티지 정원을 탄생시켰다. 초기 정원의 형태는 꽃과 채소와 허브, 과실수 등을 심어 18세기 영국 풍경식 정원양식과 비교해 보았을 때 매우 실용적인 면모를 갖추었다고 볼 수 있으나, 많은 관상적식물과 실용적 식물들을 정원의 소재로 쓰면서 중산층 정원의 이미지를 구축해 나갔다. 그들은 여가로써 정원 일을 즐겼고, 이러한 코티지정원은 제킬과 로빈슨과 같은 전문가들에 의해 식물의 색감, 질감, 층위, 생태 등의 다양성을 고려한 예술적 면모를 갖춘 형태로 진화했다.
이렇듯 코티지 정원은 협회의 다양한 활동과 근대화과정의 특수한 사회적 배경, 중산계층의 문화적 소비를 함축하는 결과물이다. 대중들도 ‘취향의 발전’을 거듭하며 다양한 식물을 조합해보고 심어 보며 정원술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게 됐다. 영국 정원문화의 대중화는 결국 시대가 무대를 만들었고 전문단체가 이를 촉진시켰으며, 행위자는 일반 대중들이였다고 볼 수 있다.


■RHS 활동 전개로 본 한국 정원의 대중화 방향

영국 정원문화의 대중화는 하루아침의 일이 아니다.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가 국민들에 의해 축적됐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왜냐하면 정원은 그 지역의 풍토가 반영된 인간의 정신문화를 반영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정원문화도 자연스럽게 형성되고 성장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연구는 19세기에 만들어진 RHS라는 영국의 한 자선단체의 발생과 활동들을 당시 통합적인 사회적 배경과 견주어 고찰해 봄으로써 정원문화의 대중화가 어떻게 구축되어 왔는지에 대한 연구이다.
19세기 초에 등장한 RHS는 수집, 연구, 출판, 전시 및 쇼 등 지속된 활동을 통해 가드닝을 대중화 시켰다. 특히 식물 수집에 대한 열정은 원예연구와 전시, 디자인 쇼를 통해 오늘날에 이르며, 영국정원의 이미지를 국가적 차원의 인식으로 부상시켰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RHS의 역사와 활동들은 정원문화의 대중화를 서서히 그리고 견고히 하는 중요한 매개체로서의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지속가능한 정원문화를 창출하고 향유하기 위해서는 관련 공공기관과 민간단체 간에 시스템적 기반이 잘 구축돼야 한다. 하지만 이 연구는 시민 또는 국민 중심의 자생적 정원문화 생산을 위해서는 전문적 성격을 지닌 자선단체의 보다 유연하고 직접적인 개입이 필요하다는 전제에서 진행했기 때문에 다소 연구자의 주관적인 해석이 개입되었을 여지가 있다.
또한 RHS는 정원과 원예라는 각기 다르지만, 한편으로는 인접한 분야를 협회라는 한 묶음에 공존시키며, ‘영국적 정원문화’라는 시너지를 가져왔다. 정원에 있어서 식물은 중요한 부분이고, 이는 조경과 원예, 산림이 상충되는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게끔 한다.

▲ 대한민국 1호 국가정원 ‘순천만정원’. 순천만정원은 지난해 말 누적관람객 수가 500만명을 돌파하는 등, ‘정원문화’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국민에게 제시하고 있다. <사진제공=순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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