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건축콜렉션(12) 반(反)기억의 공간 ‘노근리 평화기념관’
현대건축콜렉션(12) 반(反)기억의 공간 ‘노근리 평화기념관’
  • 이오주은 기자
  • 승인 2014.03.10 17: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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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주의 진보작가 故이종호의 유작 - (수정)

“대전 전투에서 패한 미군은 1950년 7월 21일 영동으로 후퇴했다. 당시 영동 방어선 붕괴는 인민군의 부산 진격을 의미하는 매우 중요한 전투였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을 전혀 모르는 영동읍 주곡리와 임계리 마을의 주민들은 이따금 들리는 전쟁의 포성 속에서도 한해 풍년을 기약하는 김매기에 여념이 없었다.”

- 전쟁을 알지 못한 사람들, <노근리 평화기념관> 전시 글 중에서. 
 

 

‘우수한 작품’을 통해 사회에 발언했던 참다운 실천주의 건축가 이종호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가 지난 2월 차가운 겨울바다에 투신함으로써 영욕의 삶을 마감했다.

추모식을 취재하고 돌아오는 길에 ‘그냥 살아서 오명을 벗지’라며 혼잣말 했던 내 육성을 떠올리고는, 그럴 수 없었던 - 자존심과 명예를 위해 목숨을 바꾼 - 그는 과연 어떤 작업으로 신념을 실천하는 건축가였는지, 이 지면을 통해 다시 한번 상기하고 싶어졌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하고픈 말이 죽을 만큼 많아 세상을 등 졌는지도 모르겠다. 공교롭게도 그의 마지막 작품은 <노근리 평화기념관>이다. 이 또한 억울하고 안타까운 죽음이었다.

충북 영동군 노근리 학살 현장, 지금은 13만여 평의 평화공원이 조성된 곳에 ‘건축을 통한 사회의 점진적 발전’을 갈구했던 이종호의 유작이 있다.

그는, 희생자의 진실이나 위로에는 무관심한, 살아있는 권력과 욕망들이 역사를 은폐하기 위해 여전히 긴장의 끈을 팽팽히 당기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에 건축가는 묻는다. ‘아직은 평화를 외치기에 너무 이르지 않느냐’고.

“노근리 사건에 대한 집단기억의 과정은 현재진행형이다. 따라서 이 기념관에선 현재까지 드러난 사실만을 전달할 수 있을 뿐, 온전한 역사를 말하거나 누군가에게 평화를 외칠 수 없다. 그것을 공간에 표현하고 싶었다” - 이종호

이것이 노근리 평화기념관 건립사업의 타당성에 관하여 이종호가 건축으로써 화답한 내용의 핵심이다. 희생자와 그 유족들의 고통을 전달하는 것, 그것이 이 작업에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소명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전쟁을 알지 못했던 사람들’, 1950년 여름 미군의 무차별 총성이 어둠을 갈랐을 노근리 쌍굴다리 속에서 희생된 수백명의 주민들, 그 위폐 없는 영혼들에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이 공간을 통해 이름뿐인 평화공원이 아니라 ‘진정한 평화’에 점진적으로나마 다가설 수 있기를 소망했던 건축가는 이제 세상에 없지만 그의 진실은 살아 있는 듯하다.

한국건설신문 이오주은 기자= yoje@conslove.co.kr

 

▲ 전시공간에서 계단을 오르면 ‘추모의 방'이다. 외부로 최대한 돌출돼 노근리 사건 현장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돼 있다.

 

■현대건축콜렉션(12)  

노근리 역사평화박물관 / 故이종호

어떻게 바라 볼 것인가. 150인이 숨졌다. 13인의 행방을 모르고 55인이 다쳐 장애를 얻었다. 1950년 7월 26일에서 29일의 일이었다. 그러나 그 숫자들도 정확치 않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사흘 밤낮 동안 쌍굴다리 안에서 두려움에 떨었다. 그리고 생사를 갈랐다. 반세기가 흘러갔다. 아무도 책임을 말하지 않았다. 진상도 알 수 없었다. 사건은 분명 있었으되 어디에도 없었다. 수천의 유족들은 위패 없는 제사를 올려야만 했다. 유족 일부의 끈질긴 노력에도 진실은 재구성 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은폐되기도 했다.
전쟁의 비극, 우발적 사건이라 했다. 다른 피해들과 묶어 위무(慰撫)되려 했다. 그러나 속속 드러난 기록들이 입을 열었다. 노근리 이곳에서의 사건이 결코 전쟁이란 큰 비극 속에 묻힐 작은 사건이 아님을. 특별법이 공포되었고 위령사업이 진행되고 있으나 진실은 아직 멀다. 노근리의 사건은 역사로 말해지기에는 아직 많은 부분이 남겨져 있다. 평화를 말하기에는 여전히 주체와 대상이 불분명하다. 분명한 것은 오직 희생자들의 공포와 유족들의 크나큰 고통뿐이다.

■집단기억

노근리 사건이 우리의 표면으로 떠 오른 것은 오로지 유족들의 기억 때문이었다. 그들의 활동이 있었다. 그로 인해서 역사적 기록의 조각들이 드러났을 뿐이었다. 그 기록의 조각들을 앞에 놓고도 정확한 사실은 역사로 인정되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직접 경험한 일들은 자전적 기억에 속한다. 역사적 기억은 역사적 기록을 통해서만 접할 수 있는 기억을 말한다. 하지만 우리에게 노근리의 기억은 여전히 활동적인 과거다. 그러기에 단지 우리의 정체성을 계속 구축해 나가는 집단기억의 과정에 속할 일이다.
하지만 집단기억의 과정에는 사건을 둘러싼 욕망들 사이에 어떤 긴장이 놓여있게 된다. 국가기관들, 피해의 당사자들 그리고 관찰자들의 욕망이 있다. 보편의 사회적 기억으로, 생애의 자전적 기억으로 그리고 인류의 교훈적 기억으로 갈린 긴장이 있다.
긴장의 상태가 정리되지 않은 노근리에서 ‘역사’와 ‘평화’를 말하는 공원은 아직 불안정하다. 또한 ‘역사’와 ‘평화’를 말해야 하는 박물관은 공허하게 시작될 수밖에 없다. 공허하게 시작되는 건축은 집단기억으로 향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건축이다.

■반 기억

 

공식화된 역사에 대항하는 기억을 ‘반 기억’이라 부른다.
반(反) 기억은 개개인의 경험이자 파편화된 기억이다. 자칫 제도화 되려는 기억의 틈새를 비집고 개입하려는 기억이다. 섣부른 기념비와 추모의 상징이 가진 공식적 기억의 아우라(aura)를 벗겨내는 기억이다.
‘반 기억’을 세우는 일에는 개인의 체험이 중요하다. 특히 그의 몸에 각인되는 체험이 소중하다. 그럴 때의 체험은 정지된 곳으로부터의 시각을 넘어 움직이는 육신에 가해지는 공간성이 우선된다.
노근리 사건에 대한 집단기억의 과정은 현재진행형이다. ‘역사평화박물관’에서는 현재까지 드러난 ‘사실’만을 전달할 수 있을 뿐, 온전한 역사도 누군가를 향한 평화도 아직은 외칠 수 없다. 시간을 두고 공식화되려 하는 어떤 역사를 오랫동안 지연시키려 할 뿐이다.
현재진행형의 집단기억 과정을 지켜보아야 하는 ‘노근리 역사평화박물관’은 ‘반 기억’의 건축이 되려 한다. 그것은 방문자의 몸에 공간으로 개입하는 건축이 되려 한다. 그 개인의 개별적 체험이 누적되어 우리의 정체성을 계속 묻는 건축이 되려 한다. (글ㆍ사진 제공 / 스튜디오 메타)
 

■건축개요 | 위치-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683-3번지 / 대지면적-132,240㎡ / 연면적-1,891.75㎡ / 건축면적-922.17㎡ / 규모-지상 2층, 지하 1층 / 구조-철근콘크리트조 / 외부마감-노출콘크리트, 내후성강판, 투명복층유리 / 설계기간-2009.03~2009.11 / 시공기간-2010.04~2011.11 / 설계-이종호, 우의정 / 시공-(합)한양종합건설 / 건축사진-김재경. 

▲ 등록문화재 제 59호로 관리되고 있는 쌍굴다리. 총탄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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